인류는 소통하기에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간다[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Queen, Prince 등 익숙한 단어도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가진 것처럼
영어는 물론 영어의 본산인 영국
나아가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는 한계
요즈음 필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언어에 대해 읽으며 공부하고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시장에서 매일같이 쓰는 것이면서도 그 작동과 진화 원리를 수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정한 복잡계이자, 시와 같은 작품을 통해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는 창의적 표현 도구로서 언어는 참 매력적이면서 쉽게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전공은 하지 않았어도 항상 관심이 많았다.
나는 집에서 아주 많이 걱정을 할 정도로 늦은 네 살의 나이가 되어서야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남들과는 다르게 내가 처음으로 말을 하던 날이 기억난다. 집마루에서 앉아 있던 어느 날 이제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첫마디가 저절로 나왔고 집에 와 계시던 어른들이 내가 드디어 말을 했다고 서로 큰 목소리로 부르고 뛰어다니셨던 기억이 난다. 이런 나의 기억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말을 뗀 것이 네 살 때라는 얘기를 불과 몇 초 전에 했는데도 그걸 잊어버리게 만드는 선입견(‘첫말은 한두 살 때 한다’)의 힘은 참 크다.
남들보다 일, 이 년은 늦게 말을 시작했으니 태생적으로 언어 기능이 뒤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도 말이 빠르다는 지적을 심심찮게 받으면서도 또 발성과 어조가 비교적 명쾌하다는 말을 듣는 걸 보면(몇 년 전 캐나다 사람이 만든 한국말 소개 유튜브 영상에 목소리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최근 조회수가 160만까지 올랐다!), 언어는 나와 평생 밀고 당겨온 동반자이기도 하다.
좋든 싫든, 자의든 타의든 우리 국민들과 평생을 밀고 당겨온 언어 하나를 고르라면 영어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워서 써온 한국말과는 구조도, 단어도 다를 대로 다른 저 언어의 읽기·듣기 시험 공부를 위해(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말이다) 우리 국민이 투자한 시간과 돈은 단일 교과목으로서는 최대일 것이다. 그래서 ‘어렵지 않은 말로 돼 있고’, ‘짧은’ 영문장 정도는 독해할 수 있는 게 국민적 특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영국 사람의 말, 남이 생각하는 그 말의 뜻, 영국 사람의 진짜 뜻”이라는 밈(meme)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다음 것이 있다.
영국 사람의 말: “I hear what you say.”(직역: 네 말을 듣고 있어.)
남이 생각하는 말뜻: “He accepts my point of view.”(내 관점을 받아들이는구나.)
영국 사람의 진짜 뜻: “I disagree, and do not want to discuss it further.”(난 네 말에 동의하지 않고,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어.)
영국 사람의 말: “Quite good.”(꽤 좋네.)
남이 생각하는 말뜻: “Quite good.”(꽤 좋네.)
영국 사람의 진짜 뜻: “A bit disappointing.”(조금 실망스럽다.)
영국 사람의 말: “Very interesting.”(아주 흥미롭군.)
남이 생각하는 말뜻: “They are impressed.”(꽂혔나봐.)
영국 사람의 진짜 뜻: “That is clearly nonsense.”(말도 안 되는 소리네.)
이 정도면 대략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으리라. 이처럼 극도로 단순해 보이는 말이라고 해도 직역하는 정도로는 그 속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일이 허다한데, 단어의 여러 가지 가능한 뜻을 잘 가리지 않은 채 게으르게 번역을 한다면 사실과 다른 오역이 될 뿐만 아니라 언어의 맛도 전혀 즐길 수 없게 된다.
엘리자베스 2세 서거를 계기로
세계는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확인
과거에 대한 단편적 선·악 구분보다
미래 위한 정신·제도적 유산 활용을
최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로 영국 왕실에 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상황을 빌려 ‘quee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엘리자베스의 경우처럼 ‘queen’은 여왕을 뜻하기도 하지만, ‘king’(왕)의 부인인 왕비, 왕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의 장남인 찰스가 king이 되자 그의 부인인 커밀라는 이제 왕비로서의 queen이 되었다. 이처럼 다른 뜻을 구별하기 위하여 엄밀하게 말을 해야 할 때는 ‘queen regnant’(여왕), ‘queen consort’(왕비·왕후), ‘queen dowager’(죽은 왕의 부인·대비), ‘queen mother’(현왕의 모친), ‘queen regent’(섭정여왕)처럼 나뉘지만, 말의 맥락에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인지 명확할 때는 모두 ‘queen’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말에는 없는 영어의 한 특징이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보면 왕 조프리의 모친인 세르시와 그랜드 메이스터 파이셀 사이의 대화가 나오는데, queen에 대한 위의 사실을 알지 않고서는 그 둘 사이 신경전의 맛을 잘 볼 수가 없다.
파이셀: Your grace, QUEEN Margaery…
세르시: THE Queen is telling you…
파이셀은 왕 조프리의 부인인 마저리가 왕비로서 queen 가운데 으뜸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한 것이고, 이에 기분이 상한 세르시는 왕의 어머니로서 자기도 queen임을 상기시키고, 더 나아가 ‘The’ Queen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유일한 queen이라고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 즉 둘 다 서로 다른 종류의 queen(queen consort 대 queen mother)인데도 최고 권력자를 뜻하는 queen의 의미에 기대어 자기가 더 강력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굳이 번역한다면
파이셀: 마마, 마저리 왕비께서는…
세르시: 진짜 왕모인 내가 다시 말하는데…
이렇게 되는데, 왕비 앞에서 굳이 자기가 ‘진짜 왕모’라고 하는 어리둥절한 일이 될 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이제 queen만큼이나 헷갈리는 ‘prince’를 생각해보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이 Prince로 불렸다. 보통 prince는 우리말로 ‘왕자’라고 주로 옮기지만, 이 또한 일부의 경우에만 옳은 번역이다. ‘prince’는 일반적으로는 왕가의 직계남성을 일컫는다. 필립은 그리스 국왕과 덴마크 국왕의 직계손으로서 태어날 때 prince였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이후에 이 출생을 존중받는다는 의미에서 영국 왕실에서도 prince라는 호칭을 받은 것이다. 왕의 직계손이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가 일국의 왕인 적은 없으니 사실 ‘왕자’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엘리자베스의 손자인 윌리엄과 해리도 우리말로는 지금까지 ‘왕손’이었다가 아버지 찰스가 왕으로 등극하자 ‘왕자’로 변했지만 영어 명칭으로는 계속 prince이다.
그렇다면 또 왜 이탈리아 정치이론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책 <The Prince>(이탈리아말로는 <Il Principe>)는 <군주론(君主論)>으로 번역되는 걸까? 왕가의 직계남성으로서 몇몇의 prince는 왕보다는 밑으로 처지지만 자신의 영토와 백성을 갖고 지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군주’로 볼 수도 있고, 그 책 내용 자체가 prince가 투쟁으로 이루어야 할 생존과 명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그 단어의 모든 뉘앙스를 살리는 완벽한 번역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프린스론’이라고 하면 무슨 금리우대 대출처럼 들리기만 하는 건 나뿐일까.
왜 지금까지 외국어 단어에 대해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지 묻는다면 난 일부러 그랬다고 대답하고 싶다. 프랑스의 루이 14세(재위 1643~1715)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길었던 엘리자베스의 재위기간에서 세계가 목도한 전쟁의 시작과 끝, 문화와 과학의 발전, 국가의 소멸과 탄생을 이야기로 풀어내자면 몇 백, 몇 천의 책으로도 부족할 터다. 하물며 ‘queen’, ‘prince’처럼 익숙한 단어의 의미에 대한 몇 문단의 설명도 한 번에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정규교육을 통해 밤낮을 함께한 언어에서 흔한 두 단어에 대해서도 이렇게 복잡한 사정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텐데, 과연 영어 전체에 대해, 더 나아가 그 언어의 본산인 영국,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사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얼마 전 팟캐스트를 듣다가 개인적으로 조금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다. 런던에서 영제국사를 연구하고 있다는 사람에게 “영제국은 사악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렇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개인의 사상에 대해 내가 나서서 옳다 그르다 따질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그 질문의 대답이 “아니오”였다고 해도 같은 절망감을 가졌을 것 같다. 평생을 바쳐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네”, “아니오”라는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다는 태도 자체가 그렇게 보고 싶지 않은 후진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제국은 비록 소멸되었지만 인간으로서 인기가 높았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에 사람들이 진정 어린 추모를 보내자 이때다 싶어 ‘영국 제국은 사악함’을 노래한다는 것은 영국이 떠난 이후 심하게 파괴돼가는 홍콩의 민주주의에 눈을 감는, 또 ‘영국 제국은 절대선임’을 노래하는 것은 지금도 영국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인종차별적 태도를 볼 때 과거에는 얼마나 더 심했을지 생각하지 않는 선택적 눈감기(selective blindness)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 부끄러운 모습이 자신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영제국이 인류 역사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는 과정에서 누군가에게는 좋은 일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부당하게 핍박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타파해야 할 부당한 관습도 남겼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life goes on’) 내일도 그다음 날도 지속적으로 다른 나라, 다른 문화와 소통해야 한다.
우리는 모국어가 다른 사람들과 전 세계 어디에서 만나도 통용되는 국제어(lingua franca)인 영어로 이야기하고, 영국의 법을 따라 계약을 맺고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새로운 사상과 물질은 미래에도 계속 우리 삶을 만들어갈 자산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과거의 모습을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전 세계가 하나로 엮여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이번의 일을 통해 우리가 진정 가져야 할 자세는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와 제도 같은 자산들에 기반해 더 좋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려는 마음가짐이다.
▶박주용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박주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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