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TALK] (17) 딜레마 상황에서 일관성 유지하기

박재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입력 2022. 9. 2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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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기자가 촌지를 받아도 되나요? 둘째, 취재를 위해 위장취업을 해도 되는가요? 질문의 취지가 비슷하다며 둘 다 안 된다고 답할 사람이 많겠지만, 두 질문을 조금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고 답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견 없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촌지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기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두 번째 질문의 답은 엇갈릴지 모릅니다. 위장취업을 극구 반대하는 기자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기자도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 2019년 한겨레 기자는 요양원에 요양보호사로 위장취업해 한 달간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보도하여 <한국기자상>과 <관훈언론상>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쉽게 합의점을 찾을 수 있지만, 두 번째 질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는 일종의 정답이 있는 반면에 두 번째 질문에는 정답이랄 게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 두 경우를 모두 윤리 문제라고 말하지만, 첫 번째 질문은 도덕의 문제고 두 번째 질문이 윤리의 문제입니다. 도덕은 바른생활처럼 옳고 그름의 문제이며 윤리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언론윤리의 출발점입니다. 언론윤리라고 하면, 당장 논쟁적 딜레마 상황을 떠올려야 합니다. 기자들은 이미 그런 상황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취재원을 비판하는 기사를 취재할 때, 취재원에게 기획의 취지를 털어놓아야 하나요, 아니면 적당히 숨겨야 하나요? 홍보팀장의 도움으로 필요한 정보를 얻었는데, 홍보팀장이 몇몇 정보는 보도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인가요? 선행으로 존경받는 자선기관이 큰 모금 행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한 간부가 모금액을 착복했다는 것을 기자가 알게 됐고, 기관의 또 다른 관계자는 그 사실이 공개되면 모금 행사가 차질을 빚을 수 있으므로 보도하지 말라고 부탁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탐사보도팀이 공항 보안 검색에 결정적 하자를 발견하여 보도하려고 하는데, 그리되면 테러리스트에게 보안 검색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줄 위험성이 있다. 그래도 보도할 것입니까? 근로자가 열악한 노동조건과 임금체불을 못 견디고 분신자살하는 장면을 사진기자가 촬영했다면, 그 사진을 보도할 것인가요? 위 상황에 대한 기자들의 대처는 제각각일 것이므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다음의 사례를 통해 한국 기자들의 대체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 일간지 기자는 노숙인을 동행 취재하면서 노숙인이 주거 관련 정보를 찾지 못하자, 직접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알아내 노숙인이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고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또 다른 기자는 치료감호를 받은 조현병 아들과 어머니를 취재하면서 이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주민센터에 알려주었으며 이들이 몰랐던 법령을 찾아내 병원 원무과를 통해 입원비와 진료비를 돌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두 기자는 이런 내용을 모두 기사에 보도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도덕 사회고 기자들이 워낙 착해서 그런지 몰라도 기자들은 사정이 딱한 취재원을 보면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기자가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는 인식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이 저널리즘의 관찰자 원칙을 어긴다고 생각하기보다 인간적 기자의 당연한 의무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널리즘의 원조인 미국의 기자들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2002년에 불법 이민을 취재하던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소니아 나자리오(Sonia Nazario) 기자는 미국에 먼저 와 있던 어머니를 만나러 미국-멕시코 국경에 도착한 온두라스 소년 엔리케를 동행 취재했습니다. 엔리케는 미국의 어머니와 연락해야 했지만, 전화번호를 잃어버렸으며 그 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온두라스에 전화를 걸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엔리케는 세차 일을 하며 하루 한 끼만 먹는 등 2주간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 나자리오 기자는 문제의 그 전화번호를 알면서도 엔리케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기자가 사건에 개입하면 진실의 흐름이 바뀐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기자들의 성향을 알게 해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화재가 발생한 연립주택의 3층 난간에서 모자(母子)가 추락하자, 밑에 있던 미국 사진기자는 떨어지는 이들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그 장면을 촬영하여 신문에 실었습니다. 2013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폭탄 테러 때, 많은 미국 신문은 부상자들이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진 장면을 그대로 보도했습니다. 왜 미국 기자들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한데, 그 이유는 뉴스의 본질과 연관됩니다.

왜 언론은 교통사고를 보도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의 이유는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교통사고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통사고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목격한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뒤집힌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피를 흘리며 뒤엉킨 모습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통사고를 잘 모릅니다. 교통사고가 이럴진대 전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기사에서라도 본 적이 없으므로 여전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끔찍한 장면을 그대로 보도해야 한다고 믿는 기자는 그래야 사람들이 교통사고나 전쟁에 경각심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보도의 정확성이나 역사적 기록 같은 저널리즘 가치도 이쪽 편에 함께 서 있습니다. 이와 반대편에 있는 기자는 끔찍한 장면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주며 어린이들의 교육에도 안 좋으므로 보도하지 않거나 흐릿하게 변조하여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들은 그것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자극적 장면이 없어도 사건을 전하는 데 지장이 없으므로 그것은 기사 주목도를 높이려는 선정적 전략에 불과하다고도 할 것입니다. 이처럼 언론윤리는 ‘가치(value)의 충돌’이고, 기자는 불가피하게 그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위에 예로 들었던 위장취업 취재, 취재의 취지 공개, 취재원의 비보도 요청에 대한 대응, 특종을 위한 안보 위험 감수, 분신 장면 촬영 등에도 여러 가지 저널리즘 가치들이 상충합니다. 언론윤리가 결국 선택의 문제라면, 어느 쪽이든 선택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언론윤리는 이런 윤리적 상대주의를 조장하거나 긍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반문은 언론윤리의 실체를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해줍니다.

기자는 비판을 업으로 삼은 사람인데, 그의 잣대가 상황에 달라진다면 신뢰는커녕 불신만 쌓일 것입니다. 노숙자의 사정이 딱하여 도와주었다면, 유사한 상황에서도 계속 그렇게 해야 합니다. 즉 노숙자처럼 가난하고 착하게 보이는 사람뿐 아니라 부자이고 나쁘게 보이는 사람도 곤경에 처하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노숙자 같은 개인의 불행이 안타까워서 기자가 상황에 개입한다면, ‘동물 국회’같은 국가적 불행에는 더욱더 개입하여 몸싸움하는 국회의원들을 뜯어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지 말고…. 이런 논리가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동시에 일리가 있으므로 기자의 사건 개입은 판도라 상자를 여는 것과 같습니다. 일관성은 언론의 생명입니다.

언론윤리는 ‘바른생활’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좋으냐, 무엇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쪽이든 일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언론윤리의 핵심입니다. 일관성은 갑자기 생기지 않으며 누가 지시한다고 해서 바로 형성되지도 않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상의 취재 상황에서 기자가 진득이 고민해보고 윤리적 선택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윤리 이슈를 스스로 고민하고 동료들과 토론하고 선택지를 찾아보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요즘에 시신은 당연히 보도하지 않지만, 과거의 한국 언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91년 4~5월 한 달간 민주화를 위한 분신·투신 자살이 9건이나 발생했을 때, 신문은 건물에서 투신한 사람이 머리부터 추락하는 장면이나 영화 플래툰의 포스터처럼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온몸에 불이 붙은 장면을 촬영하여 그대로 보도했습니다. 이보다 훨씬 전인 1960년에는 불발 최루탄 쇠뭉치가 왼쪽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오른 김주열 군의 사진이 부산일보에 보도되어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그 자체로 한국의 역사입니다. 그 장면을 누구도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않는데, 오직 언론만 그렇게 합니다. 이런 보도를 자제하는 요즘의 언론을 두고 인권 성숙이라고 칭찬할 일만은 아닙니다. 뭔가 언론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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