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 해방' 주장한 이덕요, 출옥 예정일에 죽은 박길양..여성, 사회주의자, '무명의 헌신'에 주목한 '독립운동 열전'

김종목 기자 2022. 9. 2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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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성은 이 불합리한 인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굳게 모이라!” 이덕요가 ‘인습타파가 목전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낸 기고문(동아일보, 1927년 7월2일자)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는 “남녀 동등의 생존권” 등 원칙을 무시하는 사회나 인습은 “인류의 진화를 거스르는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든 남녀가 결혼만 하면 남자는 그대로 남존녀비의 횡포한 행동을 한다”고도 했다. 다른 기고문에서는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린되어 온 조선 여성의 해방운동” 같은 표현을 쓰며 여성 해방을 역설했다.

임경석(성균관대 사학과)은 <독립운동 열전 1·2>(푸른역사)에서 이덕요를 두고 이렇게 썼다.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다. 문필과 단체 활동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남녀평등과 여성 인권의 존중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고, 남존여비와 조혼을 반대했으며, 여성을 억압하는 재래의 인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혼의 자유를 강조했다. 의가 맞지 않는 부부라면 이혼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설파했다. 행위의 주체는 여성이어야 한다고 외쳤다.”

이덕요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28년 인천에서 성실병원을, 1930년 경성 낙원동에서 동양부인병원을 열었다. ‘명의’로 사회적 명성을 쌓았다. “(일본) 경찰의 비밀 정보문서에 따르면, 이덕요는 ‘공산주의자’로 기재”됐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 여성들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통일전선 단체인 근우회에 사회주의 몫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남편 한위건이 1928년 3월 ‘조선 공산당 제3차 검거 사건’ 때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3년 뒤인 1931년 5월 베이징으로 망명한다. 임경석은 “(국내 동지들은) 한위건과 나란히 반일 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려는 의도에서 망명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고 했다. 베이징 도착 뒤 얼마 안 돼 병으로 사망한다.

이덕요. 푸른역사 제공

이덕요에 관한 기사나 자료는 해방 이후 찾기 힘들다. 나오더라도 ‘한위건의 아내’로 언급될 뿐이다. 한위건도 1990년대 이후에야 조명받는다. 그는 ‘사회주의운동의 최고 이론가’로 불렸다. 여러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홀대와 외면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탓에) 오랫동안 공식적인 독립운동 역사서에서 사회주의를 배제해왔기 때문”이다. 임경석은 이렇게 썼다. “냉전과 남북 분단, 그리고 군사 독재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독립운동과 사회주의를 서로 무관한 것인 양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임경석은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배제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여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찾아 정리했다. ‘여성’을 한 장으로 따로 다뤘다.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 주세죽, “3·1운동 투사이자 무장투쟁을 염두에 둔 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한 김마리아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두 사람에 비해 덜 조명된 “근우회의 책사” 박신우, “여학생 만세 사건 주인공” 송계월도 함께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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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은 독립운동가 개인과 독립운동 단체 중심의 ‘박제화와 영웅 서사’도 피하려 했다. “무명의 헌신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이 여느 독립운동 열전과 다른 점이다.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 김익상이 1922년 3월 26일 밤 10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동료 김원봉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3·1운동 유혈 탄압 책임자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사건 이틀 전이다. 비밀결사 의열단의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약속하고 가담했다.

김익상과 부인. 푸른역사 제공

임경석은 이 저격 사건을 다루면서 김익상의 수감 뒤 그 가족 생계를 책임진 동생 김준상 행적도 최대한 자세히 썼다. 이태원 288번지 집 한 채를 담보로 200원을 빌려 말 한 마리를 사 화물을 운반했다. 용산 제탄소에서 석탄 운반하는 업무를 도급받았다. 1924년 여름 그만 말이 타 죽고, 집마저 일본인에게 사기당해 날아간다. 쌀과 소금이 떨어진 나날이 이어지던 1925년 6월6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김익상은 13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1936년 출옥했다. 1941년 8월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과 조우해 격투를 벌이다가 다시 수감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임경석은 “김익상의 최후는 아마도 사상전향 및 예방구금제도의 시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2월 공포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르면,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서 사상전향에 응하지 않는 자는 언제라도 다시 감옥에 수감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박길양은 서른네 살, 한창 나이인 1928년 1월19일 새벽 6시에 서대문형무소 철창 속에서 숨을 거뒀다. ‘조선공산당 재판’ 피고인이었다. 이 형사재판 피고인 수가 101명이라 101인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박길양이 죽은 날은 출옥 예정일이었다. 일본은 사회단체연합장을 금지시키고, 오직 가족장으로 치르는 것만 허용했다. 화장을 종용했다. “그의 죽음이 사회적인 추모와 저항의 표상이 될 가능성을 애초부터 제거”하려 한 것이다. 젊은 아내 김씨 부인이 맞서 매장을 원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당시 기자에게 “그저 한 많은 일생이었지요.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보았더라면 할 뿐이외다”라고 했다.

이 열전엔 옥사한 이들에 관한 기록이 많다. 105일간의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난 사회주의자 이한빈 이야기도 전한다. 죽기 사흘 전에 수감 중인 동료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달라!”

채그리고리의 주검을 보존할 목적으로 제작한 철제관. 비밀결사 동료 7명이 둘러싸고 있다. 푸른역사 제공

채그리고리란 이름의 고려인 3세 독립운동가 이름은 임경석의 자료 말고는 한줄도 나오지 않는다. 조선식 이름은 채성룡.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대학을 졸업했고, 러시아공산당 연해주당 고려부 비서, 연해주당 정치학교 교수를 역임한 거물”이었다.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좌경화를 선도”하려 입국했다. 1928년 2월 4일 경성역에서 체포됐다. 출옥 20여 일 뒤인 1930년 4월19일 사망했다. 죽기 직전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의학 연구 재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유지를 남겼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해부학 실습에 사용됐다. 사후 1주년 동지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혁명을 상징하는 별을 양각한 강철 관을 만들어 남은 유해를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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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한 장은 ‘배신’이다. 김단야가 밀정 독고전의 배신을 상하이에서 발간하던 ‘코멘테른 조선위원회 기관지’ <콤무니스트> 지면에 고발했다. 독고전이 비밀접선 정보를 일본 형사에게 넘겨준 대상이 김명시다.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뛰어든 25세 여성, 기나긴 옥고를 겪은 뒤에도 굴하지 않고 해외에 망명하여 항일 무장투쟁에 가담한 거인”이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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