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 미타사..두뭇개 승방 속 시간의 흔적

2022. 9. 2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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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동일시해서 쓴다. 맞는 말이다. 기원전 6세기경, 싯다르타는 29세에 출가해 35세에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여기서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 석가모니는 산스크리스트어인 ‘샤카무니 즉 샤카족의 성자’를 한자 음차에서 따왔다. 그러니 부처님, 석가모니 다 같은 말인 것이다.

비구는 탁발하다는 의미에서 파생한 남자 승려를 일컫는다. 이 비구에 ‘승려 니’를 붙여 비구니라 하면 여승이다. 비구니의 시초는 바로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프라자티이다. 그녀는 카필라 성에서 석가모니에게 출가를 세 번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스스로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석가족 여인 500명과 함께 다시 출가를 간청했지만 석가모니께서 거절했고, 아난이 간청해 석가모니께서 출가를 허락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 왕가의 여인들이 비구니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구니가 되는 과정은 어렵다. 출가해 사마니 생활을 하고 다시 시차마나 과정을 거쳐 평생 출가해도 되겠다 인정받으면 384계의 구족계를 받고 비구니가 된다. 조선시대에 비구니 사찰이 있었다. 낙산 탑골승방, 옥수동 두뭇개승방, 석관동 돌꽂이승방, 숭인동 새절승방이다. 이 승방들이 지금 보문사, 미타사, 청량사, 청룡사이다. 옥수동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미타사가 있다. 이 미타사의 시작은 신라 시대에 비구니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888년 비구니 대원이 매주골, 지금의 금호동에 창건했고 1115년에 봉적, 만보 두 스님이 중건했다고 한다.

이후 1943년 편찬된 ‘종남산 미타사약지’에는 1824년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했고 환신 스님이 3년 뒤에 완성했다. 이후 1882년 왕실 시주로 극락전을 중창했는데 한창때는 9동 66칸의 절로 그 규모가 꽤 컸다. 미타사의 앞은 한강이 흐르고 뒤는 금호산이 그리고 동쪽에는 달맞이 봉이 있다. 이 지역은 경치가 좋아 이승만 대통령도 자주 찾던 곳이다. 미타사는 완만한 경사지에 서향의 극락전을 중심으로 맞은편에 관음전, 좌측에는 1칸의 독성전이, 우측에는 5칸의 노전이 자리하고 있다. 관음전 양측에서 시작된 담장이 극락전과 독성전, 노전을 에워싸 별원을 구성하는 조선후기 사찰배치의 특성이 미타사에 잘 남아 있다. 지금은 극락전을 중심으로 용운암부터 금수암, 칠성암, 토굴암, 금보암, 관음암, 대승암, 정수암 등 8개 암자가 미타사를 이룬다. 절은 아파트 숲 옆에 있는데 동호대교 그늘에 가려져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문에 들어서면 천불전이고 그 맞은편에 용운암과 극락전이다. 천불전을 지나면 마치 동네 골목길에 양옥집, 한옥기와집 등의 다양한 형태의 암자들이 자리한다. 미타사 스님께서 수행하던 스님들에게 암자를 하나씩 내려 지금이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천불전에는 석가여래상과 작은 금동불 1000상이 모셔져 있다. 또 천불전과 관음암 사이에는 수령 240년 느티나무가 자리해 객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금보암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있다. 이 보살좌상은 특이한 모습이다. 즉 왼쪽 다리를 접어 당기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윤왕좌輪王坐이다. 이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불상 형태로 이렇게 잘 보존된 것은 드물다. 극락전 편액은 순조의 어필로 추정된다. 1827년 이후 현재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어 화계사 대웅전, 흥천사 극락보전과 명부전, 봉은사 판전, 봉원사 칠성각과 그 가치를 같이 하는 불전이다.

비구니 사찰을 찾으면 일반 사찰보다 더 조심스러워진다. 행여나 발소리조차 스님들의 수행에 누가 될까 하는 마음이다. 미타사를 찾는다면 암자 찾기에 마음을 두지 말자. 그저 한 곳이라도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으면 족한 곳이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문화재청,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47호 (22.09.2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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