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집으로 데려오는 여자들[플랫]

플랫팀 기자 2022. 9. 2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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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 생기면 우리집에 오라고 말하던 언니들이 있었다. 나는 10대 혹은 20대였고 집이 없었고 있더라도 너무 남루했고 어떤 밤에는 정말로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언니들 집에 찾아가면 밥을 해주거나 시켜서 줬다. 내 얘기를 들어주고 언니들 얘기를 들려줬다. 자고 가라며 이부자리를 펴주기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한다. 그때 언니들 되게 바빴을 텐데 어떻게 시간 냈을까. 언니들도 가난했는데 왜 가진 걸 나눠줬을까. 그저 나보다 조금 덜 가난했을 뿐인데. 이제는 30대가 된 내가 주위 여자들에게 말한다. 사는 거 너무 힘들면 우리집에 오라고. 그럼 폭력을 겪거나 이혼을 겪거나 고립을 겪거나 자기 자신을 겪다가 탈진한 친구들이 내 소파에 누워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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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얼굴은 특별하고 슬프다. 징그럽게 똑똑한 애들이 별 고생을 다 하며 산다. 나 역시 스스로를 굴리고 돌보는 게 아직 벅차지만 때때로 어떻게든 시간을 빼서 그들과 함께 있는다. 먼저 태어난 여자들이 그러라고 알려주었다.

나의 오랜 친구 담은 가끔씩 자신의 집을 ‘엄살원’으로 운영한다. 엄살원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거기 가서 엄살을 피우고 싶어진다. 딴데 가서는 못할 얘기도 편히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담은 엄살원을 ‘밥만 먹여 돌려보내는 엉터리 의원’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손님을 초대해 솜씨 좋게 비건 만찬을 차려주고 이야기를 듣는다. 부엌일 하느라 어수선했던 담의 마음은 손님 앞에서 정연해진다. 손님들의 이야기는 웃기고 통탄스럽고 굉장하다. 손님이 머물다 떠난 집에서 담은 긴 인터뷰 원고를 쓴다.

담이 쓴 인터뷰 중 한 편은 ‘삭제의 신’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을 삭제하는 신일까? 바로 불법촬영물이다. 디지털성폭력이 만연한 이 시대에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가들이 어디선가 밤낮으로 일하고 있다. 엄살원에 방문한 쪼이 역시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지원한다. 정확히는 ‘삭제 지원 활동가’로서 움직인다.

쪼이는 원래 미술을 전공했으나 JTBC에 등장한 김지은씨의 모습을 본 것을 계기로 당장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 일을 택했다. 쪼이가 작업을 착수하는 환경은 사실상 무한의 공간이다. 불법촬영물 유포자는 다양한 사이트에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씩 업로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쪼이와 같은 활동가들은 집요하게 그들을 쫓아서 삭제한다. 모든 능력을 걸고 ‘내 피해자’의 영상을 찾는 일이다.

이 일에는 직관과 끈기뿐 아니라 이미지를 분석하는 고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가해자의 심리를 예측해야 한다는 점에서 프로파일러의 업무와도 닮아 있다. 보기 전엔 모르는, 보게 되면 영영 달라지는 세계다.

이 영상들의 존재 유무에 따라 어떤 여자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여자의 생사가 걸린 일에 자기 능력을 총동원하는 손님의 말을, 엄살원 주인인 담이 듣는다. 누군가가 기를 쓰고 삭제를 해야만 하는 이 시대를 슬퍼하면서. 삭제하는 이에게 배우면서. 밥만 먹여 돌려보내는 동안 이야기는 식탁에 수북이 쌓인다.

담의 친구이자 엄살원 직원인 유리는 자신의 책 <눈물에는 체력이 녹아있어>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

“남자를 싫어하는 일보다 선행돼야 할 건 언제나 여자를 살리는 일이고, 그런 여자들에게 그런 남자들을 거부할 자유를 주는 방법은 안 그런 여자들이 그런 남자들보다 더 그런 여자를 사랑해버리는 거, 그거 하나뿐이다. 더 환호하고 더 욕망하고 더 열렬히 사랑하는 거. 침 흘리는 남자들보다 먼저 그 여자들을 약탈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거. 그런 걸 안 하면서 ‘남자들이 문제다, 저런 남자를 받아주는 저런 여자도 좀 더럽다’고 말하는 건 거의 그 남자랑 그 여자가 백년해로하라고 맺어주는 거나 다름없다.”

이런 동료들의 이야기를 빼놓고 어떻게 사랑과 정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남자 아닌 사람이 무탈히 집으로 돌아가는 게 여전히 어려운 세상이다. 신뢰할 수 없는 법 체계 아래에서도 친구가 죽지 않게끔 순찰을 돌고 초대하고 먹이고 재우며 힘을 보탠 사람들이 있다. 국가와 시스템이 매번 누락하는 빈칸을 발 벗고 나서서 메꿔온 여자들의 역사다. 그러나 돌봄과 살림만을 위해 24시간 대기 중인 언니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내가 원하는 건 언니들을 닮은 사회다. 다양한 언니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학습한 사회를 촉구하는 바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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