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산의 시선] '쓴다'와 '산다'는 같은 일이더라

조은산·'시무 7조' 청원 필자 2022. 9.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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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철원

글과 삶은 닮아 있다. 진실한 글은 한 사람의 영혼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건 한 삶을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적 없는 나는 글을 모르고, 나이 갓 마흔을 넘긴 나는 아직 삶도 모른다. 그러나 쓰는 고통과 사는 아픔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그러한 경험적 사실에서 비롯된 글과 삶에 관한 내 생각의 기록이다.

살아 있는 누구나 글을 쓴다. 내 아들도 글을 쓴다. 올해 여덟 살 난 아들의 코 묻은 일기장에도 삶은 피어있다. 직장인은 보고서를 쓰며 구직자는 이력서를 쓴다. 글은 살아 있다는 인식의 증서요, 기어이 살겠다는 열망의 필사다.

여백을 앞에 둔 나는 언제나 암담했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한참을 앉아 있었다. 돌이켜보니 삶도 마찬가지였다. 무수하게 쌓인 날들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글은 첫 문장이 가장 어렵다고 하듯이, 내가 꿈꿔왔던 모든 일은 시작이 가장 어려웠다.

글의 구조를 먼저 세워야 했다. 대책 없이 쓰는 글은 뒤에 가서 무너진다. 복사와 붙여 넣기를 반복하다 결국 휴지통에 버리고 만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삶의 이정표가 없던 나는 타인의 삶을 복사하고 내 삶에 붙여 넣다 결국 나 자신을 잃은 적이 있다. 그러니 기승전결을 세우듯, 삶의 구간마다 바라던 모습의 나를 세우고 마음속 사진을 찍어 남겨둬야 했다. 그 사각의 프레임은 문단이었고, 그 안의 나는 그토록 쓰고 싶었던 단 한 문장이었다.

사람이 첫인상으로 각인되듯, 글은 첫 문장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첫 문장을 쓴다는 건 글에 운명을 부여하는 행위다. 나의 첫 문장은 거창하기도 했고, 호기심을 돋우려는 듯 자극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글의 목적을 빛내는 소중한 문장이라면 더 좋았겠다. 나 자신을 먼저 낮추는 겸양의 말들도 난 써본 적이 없다. 나는 더 겸손해야 했다.

첫 문장만큼 중요한 것은 글을 밀고 나아가는 힘이다. 그것은 글(자신)에 대한 확신을 근거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누구나 타인에게 글을 평가받는다. 그러나 타인이 내 글의 주제를 바꿔놓을 순 없다. 그러므로 쓰는 자는 자신의 글 안에서 굳건해야 하고, 사는 자는 자신의 삶 안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며 크고 작은 상처를 받고 그것을 인연이라 말하듯, 글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봄날의 바람처럼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좋은 글은 쓰고 있는 당신조차 모르게 여백 위로 내려앉게 되어있다. 그렇기에 글 한 편이 미완의 사랑으로 남아 끝까지 당신을 괴롭힌다면 부디 놓아달라.

퇴고는 버림으로써 온전해지는 역설의 과정이다. 때로 우리는 쓸데없이 많은 것에 둘러싸여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회성의 증명을 위해 거느려진 인맥, 가치가 아닌 가액으로 줄 세워진 한낱 사물에 불과한 것들, 삶의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지만, 결코 삶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들. 그런 것이 글에도 눌어붙어 있다.

돌이켜보니 글쓰기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옮겨 적는 받아쓰기에 불과했다. 다른 유명 작가의 문체나 고유의 표현을 닮아가려 애쓰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글을 쓸까 엿보기 전에, 내 안의 진실한 목소리가 전하는 생생함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유명인이 남긴 명문장이 아닌, 내가 쓴 몇 줄 글에 가슴 떨릴 줄 알아야 했다.

글과 삶의 접점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같지 않은 것도 있었다. 쉽게 쓰여 편안하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한다. 유려한 문체를 가진 난숙한 글이 아름답다고도 한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웠다. 나에겐 거친 삶 속에서 솟아난 당신이 가장 아름다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글이 읽힘과 동시에 당신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없어지길 바란다. 내가 무어라 당신의 글과 삶에 참견하건, 당신은 결국 당신만의 글을 쓸 것이고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당당히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객관화 과정을 거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동과 오기가 빚은 말과 글이 종횡으로 날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러한 것과 어떠한 연관성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원래 이런 글이 쓰고 싶었다. 쓰고 사는 이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 글을 바칠 수 있음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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