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 칼럼] 일상이 지옥, 스토킹

심윤희 2022. 9. 2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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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살해 반복되는데도
피해자 신변보호 조치 미흡
가해자 추적장치 부착 등
제도 허점 메우고 인식 바꿔야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 다녀왔다. 출퇴근길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아무 의심 없이 들렀을 법한 화장실이었다. '여성안심 화장실'이라는 팻말도 걸려있었다. 여기서 20대 여성 역무원이 무참히 살해됐다니 믿기 어려웠다. 그녀는 일터에서 스토커에게 변을 당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나를 포함해 여성들은 앞으로 지하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을까. 참담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당역 10번출구 입구에는 추모의 메모지가 빼곡히 붙어있다. "스토커는 잠재적 살인마"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 "얼마나 더 죽어야 안전해질 수 있나". 스토킹 살인사건을 막지 못한 허술한 사회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피의자 전주환은 지난 16일 구속됐다. 피해자가 절실히 원했던 조치가 피해자가 희생된 후 이뤄진 것이다.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진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노원구 세 모녀를 살해한 김태현 사건(지난해 3월)과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전 여자친구를 해친 김병찬 사건(11월)이 터졌다. 12월에는 흥신소에서 구한 주소로 옛 여자친구 가족을 살해한 이석준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데도 또 억울한 희생자가 나온 것은 우리 사회가 스토킹 범죄에 무방비라는 뜻이다. 스토킹은 '살인의 전조'라고 할 만큼 무서운 범죄다. 스토킹에 시달려온 이들은 "지옥이 따로 없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스토킹의 위험성이 경시돼왔다. 병적 집착인데도 남자의 순정, 끈질긴 구애쯤으로 인식돼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 좀 따라다닐 수도 있지" 등 그릇된 사회적 통념이 스토킹을 더 부추겼다. 이상훈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의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까 폭력적인 대응을 한 것 같다"는 망언은 스토킹에 대한 안이한 인식을 보여준다. 스토킹은 사랑도, 낭만도, 호기도 아니다. 상대방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고 지배하려는 병적 증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스토킹이 중범죄로 처벌받게 된 것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다. 1999년 처음 발의된 스토킹처벌법은 2021년 3월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무려 22년이 걸렸다. 지난해 10월 시행에 들어갔지만 피해자 보호 등에 구멍이 많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라는 점이다. 이번 사건의 화근이 된 것도 이 조항이었다. 전주환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답을 들으려고 피해자를 쫓아다녔고 거절당하자 보복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안일하고 소극적으로 법을 집행한 법원도 책임이 크다. 피해자는 지난해 10월 이후 두 차례 피의자를 고소했다. 하지만 첫 번째 고소 때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법원은 "도주 우려가 없다"며 기각했다. 3년간 300여 차례 스토킹을 했는데도 법원은 타성에 젖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 번째 고소 때는 경찰이 영장도 신청하지 않았다.

피해자 신변 보호에 안일했던 정부와 사법당국은 사건이 터진 후에야 스토킹에 강력 대처하겠다며 부산을 떨고 있다. 법무부는 반의사불벌죄 규정을 폐지하겠다고 하고, 검찰은 가해자에 대한 접근 금지, 구금장소 유치 등 신속한 잠정조치에 나서겠다고 한다. 또 허겁지겁 뒷북 대응이다. 비판이 커지자 대법원도 "스토킹범을 불구속할 때 전자발찌 부착 등 조건부 석방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황당하게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보호요청을 할 수 있는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고 있다. 더 이상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으려면 법규의 미비점 보완뿐 아니라 스토킹이 타인의 일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중범죄라는 점을 사회 전체가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막을 수 있는 범죄였고, 지킬 수 있는 생명이었다"는 추모 글귀가 잊히지 않는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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