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24시] 순례자의 줄서기

이유진 2022. 9. 2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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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저녁(현지시간), 영국 런던시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조문 대기줄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남동부 서퍽지역에서 온 모녀가 "여왕을 볼 마지막 조문객"이라고 안내받은 순간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수백 명의 시민들은 탄식했지만, 이내 축하를 보냈다.

여왕의 장례식 전 나흘간의 조문기간 런던에는 긴 대기줄이 생겼다. 줄은 16㎞까지 길어졌다. 꼬박 하루를 길에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큰 소요는 없었다.

외신들은 수십만 명이 불평 없이 기다리는 영국의 줄서기에 주목했다. 이런 전통이 물자가 부족했던 전시에 배급을 경험한 데서 왔다고도 분석했다. 하지만 전시는 전시고, 2022년 런던은 자본주의 도시다. 줄서기는 자원을 못 가진 사람들의 일이 돼버렸다.

줄서기만큼 냉혹한 자본주의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으로 시간과 노동을 산다. 디즈니월드에서는 돈을 추가로 내면 '패스트트랙' 통로를 거쳐 대기 없이 놀이기구를 탈 수 있다. 명품 가방은 갖고 싶은데 뙤약볕에 종일 서 있기 싫은 사람들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대신 줄을 세운다.

부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줄을 선다. 2017년 런던칼리지 연구에 따르면 영국인은 평균 5분45초 이상 기다리면 짜증을 냈다. 이게 자본주의의 줄이다.

'그 줄(The Queue)'이라고 부른 여왕의 조문행렬은 달랐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위가 높고 낮은 사람이 똑같이 줄을 섰다.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도 13시간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긴 기다림을 추모과정으로 받아들였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긴 (조문)줄은 고통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 됐다"면서 대기줄을 "목적만큼 과정이 중요한 '순례지'"에 비유했다. 열몇 시간을 길에서 떨던 패딩 차림 순례자들은 여왕의 관 앞에서 겨우 2~3초밖에 머물지 못했다. 그래도 오길 잘했다며 벅찬 얼굴로 돌아갔다. 평소 6분 기다리기도 버거운 이들이 수십 시간을 서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추억과 여왕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줄은 나라를 하나로 묶는다. 기꺼운 순례행렬을 만들어내는 그런 지도자가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

[국제부 = 이유진 기자 youzhe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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