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교육을 위해 '마음 열 결심'

한겨레 2022. 9. 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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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영화 <헤어질 결심>. 씨제이이엔엠 제공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쓸쓸함.’ 이 단어 하나는 아무런 정보도 옮기지 못한다. 두보는 자신의 시 ‘등고’(登高)에서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끝맺는다. “힘들었던 세월 고통과 한스러움에 서리 내린 귀밑머리/ 헛되이 늙은 몸 탁주 잔 들었다가 다시 멈추었네.”

늘그막 두보에게 현실은 흘러드는 강물이요, 마음은 떠나가는 바람이었으리라. 두보가 사용한 고(苦)와 한(恨)이라는 단어는 시 전체를 통해 독자가 공감할 맥락 안에 놓임으로써 비로소 ‘특정 쓸쓸함’이 지닌 정서적 색채를 드러낸다.

독일 출신 프랑스 작곡가 오펜바흐가 작곡한 첼로곡 ‘재클린의 눈물’. 연주 시간 7분 남짓한 소품이다. 첫 소절을 마주하는 순간 형언하지 못할 복합 감정이 밀려든다. 슬픈데 우아하고, 격정적이나 섬세하다. 감정의 격랑이 잦아들자 이내 흘러내리는 선홍빛 핏줄기 같다. 모세혈관 끝까지 다다랐던 고통이 아물어갈 무렵, 마음 여린 사람의 내면 풍경이 이러할까.

오펜바흐는 1880년 숨졌다. 영국의 첼리스트 재클린 듀프레이는 세계적 명성을 키워가던 스물여덟에 다발성 경화증을 얻었고, 14년간 투병하다 1987년 숨을 거뒀다. 독일 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가 오펜바흐의 미완성곡을 정리하다 우연히 악보 하나를 발견했다. 이 시기가 공교롭게도 1987년. 베르너는 새로 발견한 곡 표제를 ‘재클린의 눈물’이라 붙였다.

감정과 정서는 고대 이래로 철학자들에게 골칫거리였다. 변하지 않는 본질을 탐구하는 데 방해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두보의 ‘등고’가 담고 있는 비애, ‘재클린의 눈물’이 표상하는 애수를 철학적 논리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 상황은 교육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 하나하나는 개인별 정서적 삶과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학교는 그것을 섬세하게 들어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학교 제도란 공리주의 철학을 구현하는 상징물과 같다. ‘최대 다수의 최대 지식’을 달성하기 위해 설계한 근대식 사회체제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 슬픔, 분노, 혐오, 놀람, 행복과 같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에 감정을 가진다. ‘상처 입기 쉬움’(vulnerability)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루소는 <에밀>에서 인간 존재의 약함으로 인해 비로소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된다고 통찰한다. 그는 이어 말한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고통이 우리의 마음에 인간애를 갖게 한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의무를 갖지 않을 것이다.”

‘상처 입기 쉬운’ 우리 인간은 자기 심정을 드러내거나 타인의 표현을 감상함으로써 평정심과 동질감을 유지한다. 학교에서 생활하다 보면 갑작스레 감정을 폭발시키는 아이들 언행을 자주 본다. 억압돼 있던 자신의 감정을 말, 노래, 춤, 연주, 그림, 문자, 낙서, 공예, 수다 등 여러가지 수단으로 풀어내지 못할 때 응어리졌던 마음이 블랙홀처럼 터져버린다.

미국의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에서 문학작품, 특히 소설이 품고 있는 교육적·공공적 의미를 치밀하게 탐색한다. 소설은 특정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독자의 눈앞에 아주 구체적인 모습으로 데려다 놓는다. 등장인물들의 상황, 내면세계, 생생한 언어를 묘사한다. 누스바움은 문학작품을 통해 독자는 타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며, 이 같은 공감에서 얻은 경험으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힘을 얻는다고 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은 이렇게 서로 연결된다.

누스바움이 <시적 정의>를 쓰기 전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봤더라면 영화가 지닌 정서교육에서의 잠재성과 그 역할에 관해 소설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논의했을 것 같다. 한 누리꾼의 짧은 감상평을 보자. “죽음은 생을 일깨우고, 사랑의 완성은 권태가 되고, 미결은 그 자체로 완결되는. (이 영화의 의미는) 무한대예요…. 무한대.”

아이들 마음을 읽어 들이자. 음악, 시, 소설, 영화를 통해 아이들이 지닌 변화무쌍한 정서의 흐름을 이끌어내자. 선생도 진솔하게 자신의 ‘상처 입기 쉬움’은 무엇이었는지 학생들에게 ‘마음 열 결심’을 하자. 정서의 교류, 그 자체가 곧 정서교육이다. 이것이 잘돼야 모든 이들의 공적인 삶이 더 수월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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