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AI 진단 기술이 갈 곳 없는 나라

최정석 기자 2022. 9. 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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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석 기자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인 A사는 자기공명영상(MRI)을 기반으로 파킨슨병을 진단하는 인공지능(AI) 진단기기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기술은 지난해 4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품목 허가를 받으며 법적으로 판매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1년 넘도록 A사 제품은 한 푼도 벌지 못했다.

B사는 엑스레이(X-ray)로 찍은 심혈관 영상을 분석해 어느 혈관에 협착이 일어났는지, 협착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진단하는 AI 진단기기를 개발했다. 지난해 10월 식약처 허가를 받고 글로벌 5위 의료기기 기업으로부터 35억원을 투자받고 수출까지 추진되며 기술력을 널리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회사 역시 국내에서 기기를 구매하겠다는 문의는 거의 없다.

두 회사 제품이 시장에서 외면받는 이유는 가격 때문이다. A사와 B사 제품은 모두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병원들은 두 회사가 만든 AI 진단기기를 살 때 정부 지원 없어 비싼 돈을 줘야만 한다.

건보 적용 여부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결정하는데, 이들은 제품이 환자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쓰일지 검증하라고 요구한다. 건보 적용을 받고 싶으면 병원에서 써보고 효과성과 안전성 데이터를 가져오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병원들은 건보 적용을 받지 못해 제품 가격이 비싸다며 도입을 거부하니, 업체들은 설 자리가 없게 됐다.

이는 AI 진단기기를 개발하는 국내 기업들이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핵심 원인이다. 시간과 돈을 들여 제품을 만든 뒤 허가를 받아도 판매가 실질적으로 어려워 손해를 보게 된다. AI진단기기 제조사 중 상장사는 13곳인데, 이 중 10개 업체가 올해 1·2분기 내내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상황이 바뀌려면 병원이 AI 진단기기를 사게끔 만들어야 한다. AI가 병원에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줘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건보 적용으로 제품값이 싸지거나, AI를 활용해 환자를 진단할 경우 의사가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도록 의료코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의료코드에는 의사의 의료 행위와 그 행위로 환자에게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있다.

현재는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든 AI의 도움을 받아 진단하든, 환자가 내는 돈이 똑같다. 진단하는 병의 종류에 따라서는 의료코드가 나뉘어있지만, 진단 방법까지 하나하나 나누고 있지는 않고 있다. 의료코드는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이 담당 중인 업무지만 전에 없던 의료코드를 새로 만들어주는 일은 거의 없다.

결국 AI 진단기기가 수익을 내려면 단순히 식약처 허가만 받는 걸 넘어 심평원과 NECA 도움도 함께 받아야만 한다. 업계에서는 3개 기관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호소가 나온다. 품목 허가, 건보 적용, 의료코드 발급까지 필요한 절차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정부는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이 ‘미래 먹거리’라고 추켜세우고 있지만, 정작 제도 개선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 식약처가 최근 신설한 ‘글로벌 혁신제품 신속심사(GIFT)’가 대표적이다. 품목 허가에 걸리는 기간을 줄이는 방안만 있을 뿐, 제품을 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건보 적용과 의료코드 발급을 부처끼리 협력해 지원하겠다는 내용은 없다.

일부에선 GIFT가 ‘혁신의료기기 제도’에서 이름만 바꾼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혁신의료기기 제도 또한 식약처가 품목 허가에 걸리는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러나 품목 허가 이후 절차에 대해선 아무 지원도 하지 않으면서 ‘반쪽짜리 제도’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A사 파킨슨병 진단 AI도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받은 제품이다.

식약처는 지난 5월 복지부, 심평원과 ‘의료기기산업 육성을 위한 5개년 계획’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뒤로 현재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는 상태다. 이전 5개년 계획은 2017년 12월 말에 나왔다. 추운 겨울을 지낸 AI 진단기기 개발사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지 알 수 없다. 정부의 빠른 움직임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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