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가도 '징역형' 받는 스토킹범 고작 14%[플랫]

플랫팀 기자 2022. 9. 2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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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연인 사이였던 B씨가 지난해 11월 이별을 통보하자 B씨를 때려 전치 3주 상해를 입혔다. 그 후 스토킹을 시작했다. B씨가 차단했는데도 100여차례 전화를 걸었다. B씨 집을 3차례 찾아가 초인종을 눌러대고 문을 두드렸다. A씨는 법원에서 ‘피해자 100m 이내 접근금지’ 등 잠정조치 결정을 받은 뒤에도 피해자를 위협했다. 주차장에서 운전하던 피해자를 발견하자 운전석 문을 발로 차고 연 다음 욕설을 하는 등 피해자를 협박했다.

A씨는 스토킹처벌법 위반과 상해, 주거침입 등 혐의로 기소됐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피해자가 처벌불원서를 제출해 재판부는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의 공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잠정조치가 내려진 이후에도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등 범행의 죄질이 나쁘다”면서도 “A씨가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점, 피해자와 합의에 이르러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리한 정상으로 고려했다”고 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 중구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16일 고인을 추모하는 추모식이 진행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지난 14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사건은 스토킹범죄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스토킹처벌법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지속적인 스토킹이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동안 스토킹 범죄를 경미하게 취급하는 법제도는 피해자를 방치했다.

📌[플랫]스토킹처벌법 시행, 법에도 구멍이 너무 많다

📌[플랫]피해자에 “증거 좀 달라”는 가해자… ‘반의사불벌죄’ 한계 노렸다

19일 경향신문이 대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에서 스토킹처벌법 시행(2021년 10월21일) 이후 현재까지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확정 판결문 218건을 분석한 결과,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들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접근금지’ ‘스토킹 중단 경고’ 등 피해자 보호조치는 제도가 무색할 정도로 실효성이 없고, 다수 피해자는 스토킹뿐 아니라 상해·협박·성범죄에도 노출됐다.

성범죄 양형기준 중 형을 감경해줄 수 있는 요소에 ‘합의’는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처벌불원(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은 감경 요소로 들어 있다. 재판에선 일반적으로 합의가 처벌불원의 의미로 여겨진다.

📌[플랫]성폭력 범죄에서 ‘합의’는 가해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가해자는 합의를 요구하며 피해자에게 끊임없이 접근해 스토킹 범죄 혐의 만큼은 면책을 받아냈다. 총 218건의 판결 중 피해자가 처벌불원서를 제출해 공소기각된 사례는 68건(31.2%)에 달했다. 10명 중 3명이 재판에서 면죄부를 받은 것으로, 모든 범죄 평균 공소기각률(1%)과 비교하면 매우 높다. 집행유예는 75건(34.4%), 벌금형은 44건(20.2%)으로 집계됐으며, 징역형은 31건(14.2%)에 그쳤다. 집행유예나 실형이 선고된 사건 중 다수는 협박이나 폭행 등 다른 범죄와 함께 재판에 넘겨진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 못 지키는 ‘무용지물’ 보호조치

스토킹 범죄가 재발할 우려가 있을 때 취할 수 있는 긴급응급조치나 잠정조치는 현실에서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스토킹처벌법상 경찰이 가해자에게 취할 수 있는 잠정조치는 서면 경고(1호), 100m 이내 접근금지(2호), 휴대전화 등 이용한 통신금지(3호), 유치장·구치소 유치(4호)다.

판결문을 보면 법원이 1~3호 결정을 내리더라도 가해자는 스토킹을 이어가기 일쑤였다. 연인 사이이던 피해자를 스토킹해 법원에서 ‘접근금지’ ‘통신금지’ 결정을 받은 C씨는 이후에도 피해자에게 300차례 전화를 걸고 “선처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미용실에서 일하는 피해자를 스토킹해 경찰로부터 ‘서면경고’를 받은 가해자가 다음날 바로 미용실에 찾아간 사례도 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중구 신당역 화장실 앞, 20일 시민들이 두고 간 과자 등의 물건이 있다. 한수빈 기자

피해자 보호조치를 어긴 가해자들 다수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법원은 “잠정조치 결정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게 접근해 죄질이 나쁘다”며 잠정조치 위반을 불리한 양형이유로 들면서도 대다수에게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선고했다. 잠정조치 후에도 피해가 수차례 반복되고, 위반해도 큰 불이익이 없으니 피해자 보호조치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보다 20여년 먼저 스토킹처벌법을 도입한 영국의 경우 피해자를 위한 임시 보호명령을 위반하면 최대 징역 5년에 처한다.

잠정조치 4호는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확실히 분리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지만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법무부와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1~7월 경찰이 신청한 잠정조치 4호는 500건에 불과했고, 그 중 절반이 넘는 277건(55%)은 검찰이나 법원 단계에서 기각됐다.

스토킹에 따라붙는 감금, 협박, 폭행….

스토킹이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경향도 판례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대다수 사건은 스토킹뿐 아니라 협박과 상해, 성범죄 등이 얽힌 상태로 재판에 넘어왔다. D씨의 경우 연인 사이이던 피해자가 헤어지자고 하자 집을 찾아가 피해자를 억지로 차에 태워 폭행했다. 흉기를 꺼내 “같이 죽자”고 협박하고 차에 감금했다. 피해자가 도망치자 4일간 400차례 메시지를 보내고 집을 찾아가 피해자를 스토킹했다. D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주거침입, 감금, 폭행, 특수협박, 스토킹처벌법 등이었다.

시민들이 17일 서울 중구 신당역 10번 출구 앞에 모여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강제추행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가해자가 재판을 받던 도중 동일한 피해자를 스토킹하거나,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한다고 피해자를 협박하며 스토킹을 이어간 사례도 다수였다. 스토킹 범죄 피해자는 강력범죄 위험에도 함께 노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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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처럼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조치 이뤄지지 않은 탓에 수사기관에 넘겨진 가해자가 보복성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별 통보 후 피해자의 집에 침입해 망치로 현관문을 깨뜨린 가해자 E씨는 경찰 조사를 받고 석방된 직후 피해자를 다시 찾아가 전치 2주 상해를 입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형사사건 수사에 관련한 피해자의 진술에 대해 보복의 목적으로 상해를 가했다”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성희 경찰대 교수와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의 ‘친밀한 파트너 살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친밀한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살인미수·예비 포함) 사건 중 스토킹이 선행된 사건 비율은 75.3%에 달했다. 스토킹이 강력범죄의 전조증상임을 시사하는 결과다. 신변보호를 받던 전 연인을 살해한 김병찬 사건, 서울 노원구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김태현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감금·협박은 유죄라도, ‘스토킹’ 죗값은 없다?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될 때부터 한계로 지목된 스토킹 범죄 반의사불벌 규정의 문제점도 구체적으로 담겼다. 피해자를 스토킹하고 다치게 한 D씨와 E씨는 모두 집행유예가 선고됐지만,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스토킹 범죄는 가해자가 피해자와 합의할 경우 처벌을 면하는 반의사불벌죄인데, 피해자가 처벌불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들 사례처럼 협박과 상해로 이어진 상황에서도 스토킹 범죄에 대해선 형식적으로 가해자 면책이 결정되는 판결이 다수였다.

가해자가 합의를 빌미로 피해자에게 접근해 면책을 받아낸 사례도 있었다. 미성년자 피해자(16)와 교제하던 F씨(23)는 피해자가 헤어지자고 말하자 지난 2월11일 새벽에 전화를 건 데 이어 “너네 가족 다 죽일거야” 등 협박 문자를 보냈다. 같은 날 피해자 집에 찾아가기도 해 스토킹범죄 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의 부탁으로 처벌불원서를 작성해줬고, 이는 피해자 본인이 작성한 것이 맞다’고 진술했다”며 공소를 기각했다.

‘찾아오지 않겠다’는 가해자의 말을 믿고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혀 검찰이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는데, 이후 가해자가 스토킹을 또다시 반복해 재판에 넘겨진 사례도 있었다. 이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는 “스토킹 행위에 재범 방지를 약속하고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아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은지 20일도 채 되지 않아 또 다시 범행을 저질렀다”며 피고인을 구금하고 징역 5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희진 기자 hji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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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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