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달라진 유니폼 색깔? 24번은 변하지 않았다!

손동환 2022. 9. 2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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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8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7월 18일 오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2022년 5월. 인천 신한은행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단비가 아산 우리은행으로 이적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쏠린 소식이었다.
그리고 신한은행이 김단비의 보상 선수로 김소니아를 선택했다. 김소니아의 이적 또한 WKBL 관계자와 팬들을 들끓게 했다.
김소니아는 이제 하늘색 유니폼이 아닌 남색 유니폼을 입는다. 아산이 아닌 인천을 홈 코트로 삼는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이기고자 하는 승부 근성이 그렇다. 김소니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24번’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STRANGER
김소니아는 한국인 아버지와 루마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거제도에서 보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루마니아에서 보냈다.
2012년. 김소니아는 한국 땅을 제대로 밟았다. 농구를 위해서였다. 농구공 하나만 바라보고, 먼 곳을 찾아왔다. 다른 혼혈선수처럼 ‘Korean Dream’을 노렸다.
하지만 한국은 김소니아에게 낯선 땅이었다. 모든 게 어려웠다. 뛰어난 외모와 춤으로 주목을 받았을 뿐, 실력으로 팬들을 사로잡지 못했다. 루마니아와 전혀 다른 한국 문화 또한 적응하지 못했다.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너무 다른 운동 문화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음식 등 모든 것이 힘들었다. 2014년 1월, 사랑했던 가족마저 병으로 쓰러졌다. 김소니아는 결국 루마니아로 돌아갔다.

한국은 어떻게 오신 건가요?
원래는 미국에 있는 대학교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한국 방송사의 PD님을 알게 됐어요. 루마니아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오셨던 PD님이셨고, 어머님께서 그 PD님의 촬영을 도와주셨거든요. 그 때 어머니께서 “우리 딸이 한국인의 피를 갖고 있고, 농구 선수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고, PD님께서는 “내가 전주원 코치님을 알고 있다. 따님에게 소개를 해드리겠다”고 하셨나봐요.
사실 저는 한국이 어떻게 농구를 하는지 몰랐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으로 갔어요. 가족도 보는 차원에서 놀러간 거였죠.(웃음) 별 생각 없이 우리은행에서 트라이아웃을 받았어요. 하지만 위성우 감독님께서는 저를 마음에 든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우리은행 소속이 됐죠.
한국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오기 전의 우리은행은 꼴찌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위성우 감독님께서 오시고, 훈련량부터 달라졌다고 들었어요. 저는 훈련량을 소화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그 때는 한국말을 더 못했고, 선후배 문화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내가 왜 야간까지 운동해야 해? 내가 빨래랑 청소를 왜 해야 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익숙해졌고, 적응하는 법도 깨달았어요. 그런데 루마니아에 계시던 외삼촌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요. 갑작스럽게 떠나야 해서, 너무 아쉬웠어요.
실력이 아닌 외모와 댄스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선이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김소니아는 2013년 12월 올스타전에서 섹시 댄스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춤이나 외모로 저를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죠. 농구 선수이기 때문에, 농구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속상한 마음이 컸어요.
루마니아에서는 30분 이상을 뛰었기 때문에, ‘김소니아’라는 선수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선 그렇지 못했어요. 한국 문화에 익숙해져야 할 시간도 필요했고요. 한국에서도 잘하는 농구 선수로 비춰지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것도 많아요.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말씀하신 대로, 2014년 1월 루마니아로 돌아갔습니다. 외삼촌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어머님께서 받은 충격도 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족이랑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쉬움이 컸어요. 한국에서 뭔가 해내지 못하고 돌아온 게... 그래서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선수로서 한국 팬들에게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EXPLOSION
2014년 한국을 떠난 김소니아는 2018~2019 시즌 WKBL로 복귀했다. 한국 입성 초기와는 완전 다른 선수가 됐다. 경기당 10분도 못 뛰던 선수가 코트에서 20분 가까이 소화하는 핵심 백업 멤버로 성장했다.
2019~2020 시즌부터 팀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됐다. 정규리그 27경기 평균 28분 28초를 뛰었고, 8.6점 6.9리바운드 2.5어시스트에 1.3개의 스틸을 기록했다. 우리은행은 2017~2018 시즌 이후 2년 만에 정규리그 1위를 달성했다.
김소니아는 2020~2021 시즌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경기당 17.2점 9.9리바운드 3.3어시스트에 1.4개의 스틸을 기록했고, ‘시즌 BEST 5’와 ‘MIP(기량발전상)’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MVP급 선수로 발전했다.
2021~2022 시즌에는 주축 선수로 첫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 비록 챔피언 결정전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투지와 기량만큼은 상대에 밀리지 않았다. 김소니아의 최근 행적을 ‘EXPLOSION’이라는 단어로 압축 가능했다. 요즘 말로 ‘쌉가능’했다.

2018~2019 시즌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언제든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어요. 기회만 온다면, 한국으로 가고 싶었죠. 다행히 루마니아에 있는 에이전트와 한국에 있는 에이전트가 순조롭게 협상을 마쳤고, 저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보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내고 싶었어요. 제가 코트에서 지켜야 할 약속들을 지키고 싶었거든요.
2019~2020 시즌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렇지만 코로나19가 아쉬웠을 거 같아요.
(당시 정규리그 1위 팀은 챔피언 결정전에 직행했다. 정규리그 2~3위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안고, 챔피언 결정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9~2020 시즌은 코로나19로 조기 종료됐고, 우리은행은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19 때문에 고통을 겪었어요. 직업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고,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선수로서 좋은 성적을 거뒀어요. 물론, 아쉬움이 컸지만, 지나간 건 지나간 거라고 생각해요.
2020~2021 시즌부터 국내 선수만 코트에 나섰습니다. 김소니아 선수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는데요.
국내 선수들의 출전 시간과 비중이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습니다. 각자 보여줄 수 있는 걸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어요. 코트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선수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2021~2022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 나섰습니다. 주축 선수로 뛴 첫 번째 챔피언 결정전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2020~2021 시즌 FINAL(삼성생명 vs KB스타즈)을 보면서, ‘내가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컸어요. 너무 뛰고 싶었어요. 그래서 FINAL에 꼭 가보고 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2021~2022 FINAL이 기대됐어요.
그렇지만 다들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저도 100%의 컨디션은 아니었어요. 챔피언 결정전까지 가는 것조차 힘들었죠. 챔피언 결정전에 갔지만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고, 시즌을 그대로 마쳤어요. 너무 슬프고 아쉬웠어요. 그래도 챔피언 결정전을 하는 동안,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ADIOS, WOORI~
2012년 한국 농구를 처음 접한 김소니아는 2022년까지 우리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기쁜 시간도 많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한국에서의 모든 추억이 우리은행과 얽혀있다.
김소니아는 우리은행의 원 클럽 플레이어가 되기를 원했다. 프랜차이즈 스타로 거듭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은행의 미래를 이어갈 자원으로도 꼽혔다.
하지만 프로는 변수가 많은 곳. 인천 신한은행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단비가 우리은행으로 이적했고, 김소니아는 김단비의 보상 선수로 신한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타의에 의해 정들었던 곳을 떠나야 했다.

김단비 선수가 우리은행으로 이적했고, 우리은행은 보호 선수 명단을 제출해야 했습니다. 김소니아 선수도 이적을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김)단비 언니가 우리 팀으로 온다고 했을 때, 이제 단비 언니랑 뛸 수 있다고 좋아했어요.(웃음) 그런데 엄마가 기사 몇 개를 저에게 들려준 후(최이샘과 김단비가 ‘같이 뛰어서 우승하겠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제가 갈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이적 소식을 듣고 나서는 어땠나요?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사무국장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이렇게 저렇게 돼서, (김)소니아가 (신한은행으로) 가게 됐다”고 하셨죠. 속상한 마음이 컸고, 쇼킹했어요.
우리은행 덕분에 한국 농구를 알았고, 한국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코칭스태프-선수들과의 추억이 컸어요. 우리은행에서 뛰었다는 자부심도 컸고요.
그렇지만 언젠가 다른 팀에서 뛰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우리은행 코칭스태프와 사무국도 이를 알고 있었어요. 또, 개인적으로 ‘내가 보상 선수로 선정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이 컸는데, (이적 소식을 듣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번 이적을 계기로, 제 농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형성된 것 같아요.
우리은행 선수들 중에서는 누가 먼저 연락을 줬나요?
(김)정은 언니 그리고 (홍)보람 언니가 먼저 연락을 줬어요. 다른 언니들이나 애들이랑은 SNS와 FACE TIME으로 영상 통화를 했어요.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김)소니아랑 있는 시간이 행복했고, 소니아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만들었어. 새로운 팀에서도 행운을 빌어” 등의 작별 인사였죠.

SHINHAN NO.24
루마니아에서 이적 소식을 들은 김소니아는 루마니아 3X3 대표팀 선수로 활약했다. 3X3으로 몸을 만든 김소니아는 7월 4일 한국으로 들어왔다. 우리은행 연습체육관이 아닌 신한은행 홈 코트인 도원체육관으로 입성했다.
한국에서 처음 팀을 바꾼 김소니아는 ‘적응’에 집중하고 있다. 새로운 팀에 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기존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김소니아의 투지와 승부욕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목표 의식도 변하지 않았다. 또, 동료의 배려 덕분에, 김소니아의 농구 인생을 상징하는 것도 지켜냈다. 그것은 바로 ‘등번호 24번’이다.

신한은행에서 가장 연락을 먼저 준 선수는 누구인가요?
(한)채진 언니가 제일 먼저 연락해줬어요. “3X3 대회 잘 하고, 다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다음에는 신한은행 선수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죠.
이적을 실감하셨을 것 같아요.
그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어요.(웃음) 하지만 신한은행 합류 후, 선수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어요. 새로운 팀이라는 느낌보다, 진작에 왔어야 하는 팀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선수들을 처음 만나기 전날에는 잠을 못 잤어요. 긴장도 걱정도 많이 했거든요.
(김소니아의 이야기를 통역한 구나단 감독은 “여러 이유로 힘들겠지만, 본인이 먼저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을 먼저 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사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김)소니아를 더 긍정적으로 봤다. 소니아 또한 우리 팀에 더 익숙해질 거다”며 김소니아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밖에서 본 신한은행은 어땠고, 신한은행에 어떤 도움을 주고 싶으세요?
우리은행 소속으로 신한은행이랑 붙으면 꼭 이기고 싶었어요. 신한은행 벤치 분위기가 너무 싫었거든요.(웃음) 신한은행은 그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팀이예요.
제가 비록 단비 언니를 대신해 신한은행으로 왔지만, 단비 언니의 자리를 메우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색깔로 팀을 이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멘탈과 마인드를 재무장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신한은행의 훈련 방식과 우리은행의 훈련 방식은 어떤 게 다른가요?
힘든 건 똑같은 것 같아요. 다만, 그 성격은 전혀 달라요. 우리은행은 웨이트 트레이닝과 런닝을 많이 하고, 신한은행은 농구와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해요. 농구와 접목되는 웨이트 트레이닝이 많고, 농구와 연결할 수 있는 운동도 많은 것 같아요.
신한은행에서도 24번을 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농구를 시작한 후, 계속 24번을 달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커리어를 증명할 수 있는 번호죠. 24번은 저에게 그런 번호인데, 24번을 쓰고 있던 (장)은혜가 양보를 해줬어요. 너무 고마웠어요. “밥 한 번 사주겠다”고 이야기했어요.(웃음)
이제 우리은행을 적으로 만납니다. 홈 코트였던 아산에서는 어웨이 라커룸을 써야 합니다.
사실 (그런 상황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웃음) 그런 게 제 머리 속에 아직 들어오지 않아요. 그저 농구에 집중하고, 코트에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어느 선수랑 부딪혀도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하고요.
사진 = WKBL 제공, 손동환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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