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할 땐 산] 알프스 넘던 게르만처럼 경계를 허물자

이지형 '강호인문학' 저자 2022. 9. 21.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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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의 추억
융프라우를 덮은 광대한 빙설은 평온한 듯 쉴 새 없이 역광을 쏘아댄다.

긴 터널을 지날 때 설국雪國을 떠올린다. 밤의 밑바닥이 하얗게 눈부신 곳,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사랑한 일본 중부 서해안의 어느 마을, 시도 때도 없이 해양성 폭설이 퍼붓는 그곳…. 가보지 못했다. 대신 드문드문 이어진, 가파르고 긴 터널의 끝에서 광대한 빙설과 빙하를 만났다. 3년 전이었고, 알프스 융프라우의 어느 안부鞍部였다. 능선으로 달리던 산이 움푹 꺼진 '안부'를 현지 말로 '요흐'라 한다. 융프라우 요흐에서 나는 현기증에 시달렸다. 오르기 직전, 동행 한 명이 다용도의 알약 하나를 권했는데 나는 고사했다. 그날의 현기증은 고산병이었을까.

융프라우에서 갑자기 현기증이

스위스 알프스의 중심에서 아이거(3,970m), 묀히(4,110m), 융프라우(4,158m) 세 봉우리가 하늘을 찌른다. 서울 복판에서 어울린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처럼 유럽의 세 봉우리는 서로를 능가하고 보듬으며 치솟는 중이다. 세 개의 육중한 산을 터널 하나가 휘돌며 관통한다. 아이거의 북벽을 뚫고, 묀히의 정면을 스쳐 융프라우의 요흐에서 멈춘다. 100여 년 전의 서툰 공법으로 그 거대한 산들을 이으려고 사람들은 무진 애를 썼다.

오랜 노력의 저항인 듯 해발 3,454m, 융프라우 요흐의 종착역은 나를 강하게 튕겨냈다. 소담한 기차를 타고 유럽 최고 높이의 기차역에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긴 일이다. 하늘 가까운 곳의 만년설은 투명하고 날카로운 역광逆光을 쏴댔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어지럼증에 당황해 뒷걸음쳤다. 해발 3,000m가 그리 대단한 높이였던가. 1,000m 안팎, 한반도의 산들을 쏘다니며 우쭐하던 시절이 부끄러웠다. 조용히, 다시 기차를 타고 비틀거리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며 생각했다. 갑작스런 현기증은 어디서 왔을까. 기압의 급변으로 인한 호르몬과 신경계의 교란이 직접 원인이다. 기차에 의지한 수직 상승 탓이었을 수 있다. 내 발로 찬찬히 고도를 올려갔다면 없었을 현기증일지 모른다. 전날의 과음과 소란이 부른 일시적 착란일 수도 있다. 아니면 모종의 경계를 넘어서려 한 데 대한 자연의 보복일까. 비행체가 소리의 속도 '마하'를 넘어서면 쾅~, 엄청난 폭발음이 터진다. 급하게 오른 3,000m도 나에게 그런 경계, 한계였을까. 때 아닌 쇼크가 어떤 탈주, 이탈에 대한 경고로 읽혔다. 현기증의 와중에 자꾸 경계란 말이 맴돌았다.

융프라우 기차는 인터라켄이라는 스위스의 조그만 마을에서 출발한다. 호수(라켄) 사이(인터)에 있어 인터라켄이다. 초승달, 그믐달처럼 생긴 호수들…. 인터라켄은 해발 567m의 분지다. 남쪽으로 융프라우의 거대한 산군山群을 세우고 있다면, 북쪽으로는 해발 1,322m의 병풍 같은 절벽 하더 쿨름Harder Kulm을 두르고 있다. 그중, 천혜의 분지를 북쪽에서 껴안은 하더 쿨름에 서면 융프라우 좌우로 멀리까지 펼쳐진 알프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경계다. 인간이 쌓아올린 만리장성 정도는 오막조막한 구조물로 격하시킬 풍경이다.

온난화는 빙하마저 잠식한다. 알프스의 알레치 빙하 위로 새 두 마리가 처연하다.

현기증의 다음날, 엔간히 돌아온 정신을 부여잡고 하더 쿨름에 올랐다. 맞은편 경계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니 '역사들'이 떠올랐다. 1,500년 전 로마와 게르만이 대결하고 융합하던 고대 막바지의 스토리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거칠고 성스러운 알프스는 문명(로마)과 야만(게르만)을 갈랐다. 문명과 야만은 오랫동안 갈등했다.

중부 유럽의 어둑한 숲에서 큰 덩치로 야생과 싸웠을 게르만들은 남진을 거듭하다 알프스를 맞닥뜨렸다. 숭고하게 솟은 설산을 넘어 다른 세계를 만나고 싶었다. 그곳엔 황금빛 올리브유와 붉은색 와인 그리고 노릇한 빵들이 있을 것이다. 탈속의 신전 주위로 웅장한 건축과 세련된 조각이 즐비할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의 꿈을, 알프스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해발 3,000, 4,000m로 치솟아 막막한 경계 앞에서 그들은 당황해야 했다. 현기증 같은 좌절을 느꼈다. 만년설로 덮인 거대한 장벽 너머로 유토피아가 있다. 넘을 수 없다.

그러나 끝내 넘고야 마는 게 인간이다. 불가침의 성산을 그들은 어떻게 넘었을까. 그날 하더 쿨름 위에 선 여행객의 궁금증을, 옆에 있던 송진 동신항운 대표가 조용한 목소리로 풀어줬다. 게르만들은 알프스 산맥 곳곳에서 그들만의 '패스pass'를 발견했다. 아무리 높은 산도 고도를 낮추어 계곡을 만들지 않는가. 패스 주위 마을엔 민박과 금융도 발달했다…. 경계는 언젠가 허물어진다.

우리는 모두 경계 앞에서 멈칫한다

게르만뿐일까. 1,500년 전 거대한 경계의 점진적 해소를 스케치해 준 송 대표만 해도 비즈니스와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살았다. 20년 넘게 융프라우 철도의 한국 사업을 이끌며 알프스를 알려왔지만 비즈니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행 거리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알프스의 생소함처럼, 재질과 높이로 환원되지 않는 아이거·묀히·융프라우의 영기靈氣처럼, 일과 삶의 경계는 늘 모호하다.

초유의 팬데믹이 모든 여행을 고사시켰던 2년 전의 절박한 어느 가을, 그는 융프라우의 새 소식 하나를 전해 왔는데 그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해 겨울 초대형의 첨단 곤돌라가 아이거의 그 악명 높은 북벽을 도발적으로 거슬러 융프라우 요흐에 도착했고(아이거 익스프레스 개통), 누군가는 또 한 번 삶과 일의 경계를 허물었다. 열정은 경계를 넘나든다.

그러나 경계 앞에서 주춤하고 끝내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게 게르만과 송 대표와 융프라우 곤돌라뿐이겠나.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경계와 한계 앞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하지만 다시 그 경계를 향해 걸어간다. 열정 때문이든, 울분 때문이든, 의무 때문이든 그 걸음은 미지의 영역을 향한 도전이다. 그 옛날 게르만의 알프스 월경越境이 그랬듯이…. 이제 무언가에 가로막혀 답답하고 막막할 땐, 북한산의 낮은 봉우리라도 넘을 생각이다. 산 하나를 넘는 일은 우리의 분투를 가로막는 경계와 한계를 허무는 일이라 믿는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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