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후의 팔팔구구] 나눌 때 풍요로운 인생

2022. 9. 21.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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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준다.

인간의 근원적 특성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한다.

비장애인들은 나눔의 삶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해왔기 때문이다.

장편소설 <대지(大地)> 로 193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 펄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년, 한국 이름 박진주) 여사가 1960년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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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전반 이기적 사고 팽배
점점 사라지는 나눔의 미덕
마음 깊이 ‘나눔’ 본성 있어 
외부로 끄집어내지 못할 뿐
몸소 실천하며 보람 느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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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준다. 인간의 근원적 특성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한다. 그런데 평생 마음의 고통을 앓는 정신장애인을 돌보다보니 그들에겐 나눔의 삶이 거의 없다는 선입견을 품게 됐다.

정신장애인들은 자신이 구축해놓은 적응 체계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나눔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선입견은 말 그대로 선입견이다. 정신장애가 없는 사람도 무엇을 나누는 데 인색하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한 지인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 전반에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해 개인 역시 이에 따른 방어기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비장애인들은 나눔의 삶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해왔기 때문이다.

장편소설 <대지(大地)>로 193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 펄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년, 한국 이름 박진주) 여사가 1960년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한 농부가 소달구지를 몰고 어느 시골길을 열심히 지나고 있었단다. 소달구지 위에는 가벼운 짚단이 꽤 실려 있었고 그도 마찬가지로 지게에 상당한 부피의 짚단을 지고 있었다. 펄벅 여사는 농부와 소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그러다 통역관을 시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왜 당신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나요? 그냥 달구지에 당신 짐까지 내려놓으면 편히 갈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농부의 답이 기가 막히다.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소가 한낱 미물이라지만 온종일 노동에 시달렸을 텐데 집으로 가는 길이 고달프지 않겠어요? 내가 짐을 나눠서 지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바로 이것이 나눔의 본모습이다. 우리네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나눔의 욕구가 늘 자리하고 있을 테다. 그걸 외부로 끄집어내지 못할 뿐 아니겠는가. 동물에게도 이럴진대 사람 사이에 나눔의 미덕이 사라져가고 있다니 실로 우울한 일이다.

1980년대 겪었던 필자 경험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한번은 정신건강을 주제로 강연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제주도를 간 적이 있다. 그때 아내와 손자가 동행했다. 그 당시 손자는 돌에 가까운 아주 어린 나이었다. 강연을 마치고 서울로 되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는데 옆자리에는 젊은 부부가 손자보다 좀더 어린 아기를 안고 탔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아기 엄마는 젖병을 꺼내 아기에게 물렸다.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손자가 갑작스레 자기도 우유를 달란다. 승무원에게 혹시 우유가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따로 마련한 게 없단다. 손자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세차게 울기 시작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손자가 우는 소리가 워낙 커서 승객들이 불편했을 텐데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우는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던 젊은 부부가 자기 아이에게 물린 젖병을 손자에게 건네줬다. 너무나 오래전 일이지만 시끄러움을 인내해준 그 당시 승객과, 자기 아기에게 먹일 우유를 기꺼이 손자에게 나눠준 그 젊은 부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젊은 부부 밑에서 아이가 어떻게 자라났을지도 자못 궁금할 때가 있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던 그 부모를 보고 자라났으리라 상상해본다. 모르긴 해도 그 아이도 지금은 30∼40대 어른으로 성장해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고, 다시 그의 자녀에게 나눔을 실천하라고 말해주는 멋진 사람이 돼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근후 (이화여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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