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현의 해협의 문명사] 대륙이 한 번도 지배하지 못했던 섬
대만해협을 바라보는 중국 푸젠(福建)의 샤먼(厦門) 앞바다에는 유럽의 식민 도시 구랑위(鼓浪嶼)가 떠있다. 아편전쟁 직후 유럽 열강이 개항장으로 차지한 섬이다. 바로 앞에 대만 영토인 진먼다오(금문도·金門島)가 있어 대만을 겨냥한 포대와 비행장이 도사리고 있다.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을 방어하던 호리(胡里) 포대를 비롯해 여러 포대가 남아있는 중국 남부 해변 곳곳에는 현대적 포대들이 대만을 노린다.
대만해협과 인근 바다에 흩어져 있는 펑후(澎湖)열도를 읽어냄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읽어내는 지름길이다. 샤먼에서 묵은 호텔에서 건너편을 바라보자니 구랑위 동북 곶에 정성공(鄭成功·1624~1662) 동상이 해협을 바라보며 밤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사이로 중국 함선이 지나간다.
타이난(臺南) 안핑(安平)에도 민족 영웅 정성공 동상이 서있다. 안핑은 대만 남부에 세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식민 거점이다. 대만해협 양안에 정성공 동상이 존재함은 본토와 대만을 연결하는 최대 촉매가 정성공임을 알 수 있다.
명말 청초에 태어난 정성공은 반청존명(反淸尊明)의 기치를 내걸고 멸망한 명조 황가의 자손을 옹립하고 대만, 진먼, 샤먼 등지를 통치했다.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그의 경호병에는 아프리카 흑인도 포함되었으며, 그가 신뢰한 특사는 이탈리아인이었다. 외세 네덜란드에 저항했으며, 한족을 존중하고 만주족을 멸시했다. 밀수꾼과 해적에서 출발하여 대만해협을 무대로 동아시아 해역의 패권을 겨뤘다.
영웅 만들기는 곳곳에서 펼쳐진다. 박물관, 동상, 무덤, 기념품 등으로. 대만해협을 무대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역사 인물이 되살아나 대륙과 대만을 강력하게 연결하는 매개체로 정치적 부상을 거듭한다.
대만해협의 또 다른 촉매는 화교다. 샤먼 시내에는 화교박물관이 우뚝 서있다. 광저우 출신인 캉유웨이(康有爲)의 ‘고국은 너를 잊지 않는다’는 명구가 각인되어 있다. 중화적 질서 속에 한족의 연대를 강조하고, 그 인연법을 애국심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정성공은 중국사의 필요에 따라 소환되고 대량 소비되는 중이다. ‘중국의 아들’이자 ‘대만의 아버지’란 표현도 등장한다. 그런데 정성공이 역사적으로 부각되고, 양안에서 모두 절세의 애국자로 모셔진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앞서 정성공은 반청존명의 반역자이자 해적 따위로 취급된 역사가 존재했다.
정성공의 부각은 ‘한족 중심의 대만 만들기’ 일환이다. 그러나 대만은 원주민의 땅이었다. 원주민은 ‘부인된 민족’이다. 그들 역사는 대만에서도 귀퉁이에서 언급되거나 인류종족학적 입장에서 관심을 받을 뿐, 주류는 아니다.
당·송·원은 해양 강국이며, 명나라 영락제도 정화 원정대를 보내는 등 강한 해양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주 이상한 일은 본토 세력이 대만을 직접 경영한 사실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오나라 손권이 대만을 쳐서 원주민을 잡아들이는 등 공략한 적은 있지만, 직접 경영하지는 않았다. 명은 대만을 제외하고 펑후까지만 지배하고 있었다. 정화 함대도 대만은 들르지 않았다. 중국사의 묘한 빈틈이다. 그 땅의 주인인 원주민이 계속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빈틈이란 표현도 사실은 지극히 중화주의적 입장이다.
가오슝(高雄)에서 쌍발 프로펠러 소형 비행기를 타고 펑후에 내렸다. 펑후의 야트막한 사두산에 있는 최초의 네덜란드 유적지 홍마오청(紅毛城)을 찾아갔다. 유럽인은 대만을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 아름다운 섬)라고 불렀다. 정성공이 대만으로 밀고 내려오기 전, 대만을 점령한 최초의 나라는 흥미롭게도 1622년에 들어온 네덜란드다. 대만해협의 빈 공간에 한족보다도 유럽 세력이 먼저 발을 뻗은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중국 본토와 일본, 유럽의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해협에서는 언제나 국제정치적 파란이 일어난다. 대만해협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성공은 네덜란드를 쫓아내고 최초로 ‘한족의 나라’를 대만에 세운다. 중국이 그를 절세의 애국자로 부각시키는 이유다. 장제스가 차지한 국민당 정부의 대만도 한족 중심의 절세의 애국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국민당 일당독재가 끝나면서 균열이 본격화했다. 그 균열에는 후대에 해협을 건너온 한족의 일파인 하카(客家)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목소리도 섞여 있다.
명의 해금정책은 상인을 해적으로 내몰았다. 일반 백성과 상인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해협을 건너 대만으로 들어섰다. 남중국해 일원은 정부 통제를 벗어난 해적의 세상이었다. 히라도(平戸)에 연고를 둔 해적왕 왕직은 모험적 국제 무역상이었다. 일본의 후기 왜구는 무역 상인을 겸했다. 해적과 왜구와 상인은 일궤를 같이하며 대만해협에 출몰했다. 해금으로 버려진 빈자리는 빈민과 어부, 자유로운 상인이 채웠다.
대만에는 네덜란드 이전에 해협을 건너온 중국인도 있었다. 푸젠의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해금을 피해 많은 이들이 대만해협을 건너와서 이주촌을 형성했다. 하지만 대만의 정체성은 여전히 원주민과 이주민, 그리고 유럽인이 각축하는 ‘부인된 땅’이었다. 왕직이나 정성공이나 본토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변방 오랑캐이자 반항아들이었다. 대만해협은 이처럼 중국과 일본,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의 계열과 사연을 달리하는 바다 오랑캐들이 차고 넘치던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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