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北核 법제화 앞에서 너무도 무덤덤한 나라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을 보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왕의 관이 영국 해군 장병 140여 명이 운반하는 포차에 실려 운구되고, 그 뒤를 따르는 찰스 3세 국왕과 앤 공주 그리고 윌리엄 왕세자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실의 핵심 3인 모두 군복 정장을 갖춰 입고 걸으며 여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하던 모습이다. 젊은 왕세자야 그렇다 치고 일흔을 훌쩍 넘긴 찰스 국왕과 앤 공주마저 도보 거리만 족히 수㎞가 넘을 듯한 장례 여정을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걷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영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바탕에 ‘상무(尙武)’의 기상과 ‘왕도 사병과 똑같이 함께 걷는다’는 정신이 왕실의 최상위로부터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여왕이 즉위 전에 왕위 계승 서열 1위 신분이었음에도 자원해서 군에 들어가 2차 대전 중 군용 트럭을 몰고 탄약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영국을 지켜낸 힘의 뿌리’구나 싶었다.
#작금, 한반도에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말하면 열의 여덟, 아홉은 비웃을 것이다. 북한 정권 수립일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7차 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무력 정책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새 법령을 채택한 바 있다. 이미 안보 불감증에 젖어버린 지 오래된 나라여서 그런지 몰라도 북한의 김정은이 ‘핵 무력 사용 법제화’를 공식화한 것에 우리나라 정부는 물론 언론과 여론조차 그리 심각하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보기가 겁날 정도로 하루하루 물가는 치솟고, 고금리에 대출 이자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부동산에 ‘영끌’이라도 한 이들은 이미 폭탄을 맞은 듯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은 ‘북핵’ 운운이 들리기나 하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코로나 때문에 차마 가게 문은 못 닫고 대출받아 버텨왔는데 그 원리금 상환일이 다가와, 코로나 상황에선 겨우 살아났지만 원리금 상환 때문에 다시 죽게 생긴 판이다. 북핵이 터지기 전에 내 인생이 터져버릴 지경인데 ‘핵 무력 사용 법제화’가 지금 무슨 상관이냐는 분위기마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자녀 유학 보낸 집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환율이 비상이고 전쟁이다. 원달러 환율은 외환 위기 때 보다도 심하게 급등해 1달러당 1400원 선을 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이고 1500선까지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원화 가치는 태풍 지나간 후 땅에 떨어진 낙과만도 못하게 됐다. 풍수해를 연거푸 겪은 이들은 이미 길바닥에 나앉은 처지가 되었지만 특별재난지구선포 운운하는 소리만 요란했지 정작 실제 풍수해 현장을 보면 가히 ‘버려진 국민’이란 말이 나와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니 이게 전쟁이지 달리 뭐가 전쟁이랴 싶을 것이다. 이러니, 북한의 핵 무력 법제화가 우리 국민들 눈과 귀에 들어오겠는가.
# 사실 민간만이 아니라 정치권도 여야 할 것 없이 마찬가지다. 야당 대표는 그 보좌진의 다급한 문자처럼 줄줄이 기소냐 방어냐 ‘전쟁’ 중이고, 여당 역시 이른바 ‘n차 비대위’와 ‘n차 가처분’ 그리고 ‘n차 윤리위’의 반복되는 쳇바퀴 속에서 서로 총질하고 수류탄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니 그 자체로 ‘망할 놈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니, 북측의 이른바 ‘핵 무력 법제화’가 적어도 우리나라 안에서만큼은 별 볼일 없는 이슈가 되어 버린 것이 차라리 당연하다 싶다.
# 하지만 북한의 ‘핵 무력 법제화’는 현 단계에서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협하는 가장 첨예한 사안이다. 그것은 단순한 선언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동안에는 방어적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김정은이 직접 최종 명령을 하달해야만 핵 사용이 가능했다지만, 핵 무력 법제화 이후에는 상대의 공격 징후뿐 아니라 주도권 장악을 위한 작전상 필요시에도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언한 것이다. 또 이른바 참수 작전에 따른 김정은 유고시에도 ‘국가무력지휘기구’가 김정은을 대신해 핵 사용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반도 상황이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 그래서 우리 안의 분위기와는 달리 밖에서는 이 사안을 심각하게 보지 않을 리 없다. 지난 18일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으로 출국할 즈음에 공개된 대통령의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도 이 사안은 비중 있게 다뤄졌다. 여기에서 윤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의 핵우산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미국과 함께 마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기존의 핵과 미사일 방어 체계는 물론 우주와 사이버 영역에서의 군사 능력까지 포괄한 패키지로 북핵의 확장 억제를 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과연 미국은 우리에게 북핵 확장 억제를 위한 포괄적 패키지를 아낌없이 쓰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정도인가? 우선 최근 미국의 군사적 관심은 대만해협에 집중돼 있고, 한반도에서는 멀어져 있는 느낌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한미 간의 FTA 협정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만 보조금 지급을 강제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IRA)을 강행하지 않았나. 윤 대통령이 이번 방미 때 이 문제를 ‘통화스와프’와 더불어 풀어낼 수 있어야 한미 동맹은 견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만약에 있을 수 있는 북핵 도발에 미국이 보유한 안보 자산을 다양한 패키지로 끌어다 쓰려면 미 하원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가 필요하기 마련인데 지난번 펠로시 하원의장 방한 시 40분 통화만 하고 만나지 않아도 됐을 만큼 한미 동맹은 의심할 여지없이 탄탄한 것인가. 이번 방미를 계기로 대통령은 한미 동맹의 속 알맹이를 채우는 데 몰입해야 한다. 그래야 ‘담대한 구상’을 넘어 ‘담대한 실행’이 가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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