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우리는 왜 이토록 이야기를 좋아할까?

2022. 9. 21.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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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픽투스, 이야기하는 인간
이야기가 사랑을 받는 것은
오랜 시간·경험의 축적 위에
재미·의미까지 더해주기 때문
이야기가 긴 역사 품은 과거라면
정보는 불연속적으로 끊긴 현재
책의 죽음은 서사 시대의 종말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당신은 이야기를 좋아하나요? 나는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퍽이나 좋아했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염려했지만 나는 자주 외할머니의 이야기에 빨려들어 혼자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다가 잠이 들었다. 세상은 온통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 많은 소설, 동화, 드라마, 연극, 영화, 오페라, 민담, 전설, 신화들은 이야기의 가지에서 피어난 잎사귀들이다. 에덴동산 이야기, 이솝 우화, 삼국지,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는 이야기 중의 이야기들이다.

당신이 사랑한 모든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이방인> <단순한 열정>도 다 이야기고, 당신이 사랑한 영화 ‘미나리’ ‘기생충’ ‘오징어게임’도 다 이야기다. 서사 장르가 이야기를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사 장르가 아닌 회화도 이야기를 품는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은 어떤 서사 장르보다 놀라운 고요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품는다.

 서사 장르 즐기도록 타고나

인류 역사에서 이야기(서사 장르)들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번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뇌가 서사 장르를 즐기도록 타고난 과학적인 근거가 따로 있을까? 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한 건 재미와 의미 때문이다. 이야기는 세계의 심연에서 반향되는 그 무엇이다. 이야기는 피부와 점막과 근육을 찢는다. 이야기는 신체를 찢고 나와 또 다른 신체를 빚는다. 그것은 시간 축적, 경험의 축적을 머금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스토리텔링 애니멀>(노승영 옮김, 민음사, 2014)에서 조너선 갓설은 “이야기하는 마음은 중대한 진화적 적응”(133쪽)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서사, 물성, 역사를 머금은 이야기를 좋아하도록 설계됐다. 상상을 자극하고, 공감 능력을 키우며, 생의 위험들을 회피하는 데 보탬이 된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나침판이고, 삶이 혼란과 미로에서 헤맬 때 유용한 지도다.

우리는 이야기를 매개로 지각을 펼치고 세상을 탐지한다. 이야기는 인간 사회를 결속시키며, 생물학적 생존 이익에 기여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인간으로 빚는 강력한 요소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퍼뜨리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체다. 인간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마음에서 이야기를 제조한다. 마음은 늘 이야기가 떠안은 불확실성 속에서 의미의 패턴을 찾고 채집한다. 이야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곧 의미를 갈망하는 마음과 하나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의미를 탐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의미 중독자라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뿐인가? 인간이 항상 진짜 이야기만 지어내지는 않는다. 필요할 때는 가짜 이야기를 지어낸다. 세상에 떠도는 음모론은 본질에서 가짜 이야기다. 세상의 그 많은 음모론은 다 이야기의 재미를 좇는 마음이 제조해낸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적응을 끝낸 인간은 이야기보다 정보를 더 좇는다. 정보는 숙고를 생략한다. 이야기가 긴 시간을 품은 과거이고, 역사라면 정보는 불연속적으로 끊긴 현재를 머금는다. 정보는 생각할 여지 없이 쌓는 것이고, 그것은 더 많이 쌓을수록 좋다. 이야기가 발휘하던 효능은 일찌감치 디지털 기반으로 생산된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가 대신한다. 인간 실존의 복잡함은 정보로 압축되고 기호화돼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의 기초 재료로 소비되는데, 그 과정에서 숙고나 사유가 무르익는 머뭇거림이 깃들 여지는 없다.

인류는 오랫동안 이야기의 마법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대는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는 동시에 갑자기 끝난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이야기의 매력과 그 여진 속에 머문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이야기를 겪는 방식도, 이야기의 존재 형식도 달라진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는 책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비디오 게임이나 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으로 바뀐다. 현실이 가상세계로 대체된 오늘의 현실에서 이야기는 더 이상 삶의 피난처나 안식처가 아니다. 책의 죽음은 픽션과 이야기 시대의 종말을 암시하는 한 징후다.

 우린 모두 '스토리텔링 애니멀'

정보는 지천이다. 어디에나 흔하게 널려 있다. 정보는 너무나 작아서 이야기가 가진 긴 시간, 세계 안에 있음, 공동체의 기억, 실재를 지각할 만한 사실성을 다 품지 못한다. 정보는 이야기가 최소한도로 쪼개져서 나온 흔적-이야기로 먼지 같이 공중을 부유한다. “정보가 현재성을 띠는 시간은 아주 짧다. 정보는 놀람을 먹고 산다.”(한병철, <사물의 소멸>, 전대호 옮김, 김영사, 2022, 11쪽) 정보사회란 먼지 같이 극소주의로 분할된 이야기가 떠도는 세상을 가리킨다. 정보사회에서는 모든 게 유동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까닭에 존재 기반의 굳건함은 쉽게 부정당한다. 우리 존재도 정보들이 만든 먼지 속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떠돌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정보를 좇는 이유는 디지털 시대가 주겠다고 약속하는 최적화된 삶, 즉 스마트한 삶을 더 이상화하기 때문이다. 디지털이 설계한 것은 접속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지배하는 세계다. 우리 뇌의 신경망들을 채우는 것은 기억(이야기)이 아니라 더 많은 정보다.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시대의 삶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는 서사적 연속성에서 멀어진다. 정보는 단편적이고 불연속적이어서 이야기로 조합되지 못한다. 인간이 정보광, 혹은 정보기계로 변하면서 실재계를 배제하고 알고리즘의 조종과 지배를 받는 정보사회로 떠밀려간다.

인간이 만들어 퍼뜨리는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 욕망, 가치 판단, 갈망 등을 움켜쥔다. 삶은 이야기와 밀착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는 힘이 세다. 이야기는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담고 저 너머로 비상한다. 인간은 이야기의 마법에서 제 삶을 이어왔다. 우리는 이야기를 즐기는 가운데 마음을 빚고 그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제 운명을 이끌어간다.

한마디로 인간은 이야기 친화적으로 진화해왔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교육과 계몽의 도구이던 이야기의 시대가 끝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덧없어라, 스토리텔링 애니멀이 이야기가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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