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문행하세요

2022. 9. 2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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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중에서 요즘처럼 문과생이 천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뿌리 깊은 사농공상 전통이 실용이나 기술에 대한 차별을 가져왔다는 문제가 줄곧 지적되곤 했는데 어느덧 사회의 무게추는 이과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가 일상용어가 된 지 오래고 거대 플랫폼 기업이 전통 산업을 대체해가는 이 시점에 대통령은 과학기술 인재 육성을 "목숨 걸고 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취업 시장에서 이과 선호는 문과생 최후의 보루였던 금융계까지 밀어닥쳤고, 문과·이과 통합 수능이라는 대입제도의 변화는 명문대 문과 계열에 고교 이과생들의 진출을 폭증하게 했으니 그야말로 문과생은 '문송합니다'로 자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기술 혁신과 사회적 변화에 따라 통합형 인재의 중요성이 커지고 그에 따라 문과·이과 구별이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지금처럼 문과의 가치가 마냥 무시돼도 되는 걸까?

문과도 전공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순수인문부터 어학, 사회과학, 법, 상경까지 추상성과 적용 범위에 따라 사고의 방향과 학습의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문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중요한 개념이 있으니 그건 바로 '이야기하기' 능력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오디세우스나 햄릿과 돈키호테를 예로 들면서 소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이야기하기로 규정했는데, 이러한 이야기하기는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흥미진진한 머리맡 옛날이야기는 소설가에게 좋은 실마리를 제공했겠지만, 방언을 연구하는 언어학자에게는 학문의 단초가 된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곳에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경제학적 상식도,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겠다는 꿈의 해석도 이야기가 기본이다. 낡은 사료 속에서 역사의 숨은 뜻을 탐색하는 사학자의 통찰력은 이야기를 발굴하는 과정이며, 명확해 보이는 사실관계 속에 감춰진 가해자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판사의 노력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이 된다.

문과에서 공통적으로 발현되는 이러한 이야기하기의 능력은 아무리 첨단기술의 시대일지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수한 데이터를 모은 뒤 트렌드를 해석하는 영역에서, 선물 가격을 예측하는 정교한 수식에서, 최신형 자율주행차의 길 안내 지도에서 끊임없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인간과 점차 유사해지는 AI의 경계를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지, 신체를 대체하는 로봇의 기능을 어느 수준까지 확대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면 상상력과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기술은 예측을 뛰어넘어 급속히 발전하는데,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점차 첨예해지고 신념과 이념의 울타리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유연한 이야기하기 능력은 기술을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선행적으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수시 원서를 제출하고 정시 수능을 준비하는 전국의 모든 문과생에게 조용하지만 힘찬 응원을 보낸다. 지금은 주눅이 들고 암담해 보이겠지만 그래도 문과라서 행운이기를, 문과여도 다행이기를 기원한다. 부디 문과이지만 행복하기를….

[장지호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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