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미국과 중국 사이, 공간은 넓다

2022. 9. 2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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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 내심이 어떻든 간에
선택과 희생 강요는 어려워
그 간극이 주변국엔 기회
능글맞고 배짱 있게 활용땐
우리가 그들 고객 될 수도
지난주 중국 리잔수 전인대 상무위원장 접견(9월 16일)부터 이번주 유엔총회, 한미정상회담, 한·캐나다정상회담까지 긴박한 정상외교가 진행되고 있다. 미·중 갈등 격화 와중에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호혜적인 한중관계도 유지한다는 정부의 목표가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다리를 펴고 누울 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 공간이 좁으면 한쪽을 편들다가 결국 다른 한쪽과 척지게 된다. 하지만 그 공간이 충분히 넓다면 한미동맹 강화와 한중관계 관리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나아가 독자적인 이익을 추구할 여지까지 만들 수 있다.

5년 전이다. 2017년 11월 베이징에서 시진핑 주석은 당시 방중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을 모두 품을 만큼 크다"는 말을 던졌다. 다투기보다 대국끼리 서로 이익과 세력권을 존중하자는 야심을 담은 수사법이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는 어느새 격세지감이 있는 얘기가 됐다. 미국과 중국은 지금 태평양은커녕 좁은 대만해협을 마주 보고 아슬아슬하게 대치 중이다.

하지만 그건 갈등의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 사이의 얘기다. 세상에는 그 둘 말고도 190개가 넘는 유엔 회원국이 있다. 지금 이들 모두가 미·중 갈등 속에서 자신의 이익과 전략을 계산하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국과 중국의 입장 사이에 얼마나 넓은 공간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난 5월 23일 출범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는 그 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었다. 애초에는 중국을 에워싸는 미국의 동맹 구상이 참가국 모두를 분쟁과 보복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는 도화선이 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분분했다. 하지만 주도국인 미국은 이것이 중국을 봉쇄하거나 미국과 중국 사이에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중국도 IPEF 출범 하루 전 왕이 외교부장의 발언을 통해 이러한 동맹이 보호주의로 귀결되거나, 공급망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지정학적 대결을 초래해선 안 된다는 이른바 '3가지 반대'를 표명했다. 미국은 참가하는 부담을 덜어 참여국을 늘려야 했고, 중국도 기왕 만들어진 IPEF나 13개 참가국 모두와 척질 생각은 없으니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선제적인 우려를 표명하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실제로 우리를 포함한 13개국이 참여한 IPEF 선언문에서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공정하고 포용적인" 지역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목표가 제시됐다. 어디에도 중국이 반발할 꼬투리는 없었다.

흔히들 미국과 중국이 주변국에 '줄서기'를 강요한다고 하지만, 국제관계의 실상은 미·중이 각자 자신의 내심과 의도에 설탕을 입혀 팔아야 하는 '세일즈'에 가깝다. 대놓고 선택이나 희생을 강요해서는 편을 얻기 어렵다. 190개국은 자칫하면 미·중이 두는 장기판의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양쪽의 견적을 비교하는 냉정한 고객이 될 수도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 있다. 미·중이 각자 갖고 있는 속셈과 그것을 세상에 세일즈하는 언어 사이에 꽤나 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내심이 어떻든 둘 다 밖으로는 자유, 개방, 공정, 포용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남의 눈치에 지레 반응하거나 귓속말에 초조해하는 사람은 쉽게 가스라이팅당한다. 자칫 장기판의 말이 된다. 미·중의 속셈은 그냥 잘 알고 있으면 된다. 그 대신 양측이 때로는 마지못해 내놓는 공식적인 말과 문서가 만들어 주는 공간을 얄밉고 능글맞게 활용하는 배짱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못 들은 척, 모르는 척도 해야 한다. 그래야 여유가 생기고 이익을 챙길 수 있다. 태평양을 넓게 쓰느냐, 좁게 쓰느냐는 우리 하기에 달렸다.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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