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89] 요한계시록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2022. 9. 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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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 요한은 특별하다.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주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영예로운 찬사를 들었고, 최후의 만찬 때 예수 바로 옆에 앉았다. 계시록도 남겼다. 그래서 교황 이름으로 가장 인기가 높다. 지금까지 교황 23명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썼다.

기독교 세계에서 ‘요한’은 왕 이름으로도 인기가 높다. 영국만 예외다. 지독하게 무능했던 존 왕 때문에 왕의 이름으로 ‘존(요한의 영어 표현)’은 절대 금기어다. 며칠 전 왕위에 오른 찰스 3세의 후손도 그 이름을 쓰지 않을 것이다. 존의 가장 큰 과오는 도버해협 건너 유럽 대륙의 노르망디 지역을 프랑스에 빼앗긴 것이다. 그때까지는 영국이 섬나라가 아니었다.

존이 살았던 노르망디의 가이야르성은 결코 함락당할 수 없는, 완벽한 요새였다. ‘사자 심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리처드 1세가 그 성을 완성한 뒤 동생 존에게 “절대로 손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전투를 감안해서 설계한 그 성은 화장실이 부족했다. 존은 자기 침실에서 용변을 보면 오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도록 화장실을 추가했다. 난공불락 요새에 허점이 생겼다. 어느 날 프랑스 병사들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 오물 구멍을 통과한 뒤 변기로 기어나와 마침내 그 성을 접수했다. 이후 노르망디는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화장실 하나가 국경선을 바꿨다.

존은 노르망디를 되찾겠다고 여러 번 반격했다. 모두 실패했지만, 매번 그 비용은 세금으로 채워졌다. 존의 악정과 폭정에 지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에게 서약서를 요구했다. 그 반란 진압 역시 실패한 존은 등을 떠밀려 거기에 서명했다. 왕의 권한을 축소하는 마그나카르타다.

존은 살았을 때 실지왕(失地王)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오늘날 영국인들은 불결한 야외 화장실을 ‘존’이라고 부르며 그를 ‘오물’로 기억한다. 무능한 리더는 역사의 심판을 피할 곳이 없다. 그것이 새로운 요한(존)계시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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