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건국자들이 한강변에 심어놓은, 백제인의 꿈
[프레시안 알림]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84강, 10월 답사는 초기백제시대에 속하는 한강변 한성백제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 옛날의 광나루에 놓인 광진교 위를 걸으며 가을의 길목에 접어드는 한강의 정취에 젖어볼까 합니다.
서울학교 제84강(제5기 제6강)은 2022년 10월 9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까지 잠실 삼전도비 앞(잠실 롯데호텔월드 석촌호수(서호) 동북측. 지하철 2·8호선 잠실역 3번출구에서 호수쪽으로 270m. 송파나루길256)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전도비-백제고분군-석촌호수길-올림픽공원정문-한성백제박물관-몽촌토성-움집터-몽촌 역사관-올림픽공원북1문-강동구청앞-점심식사-풍납토성-광진교-광나루역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강변 한성백제의 유적들>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백제 건국에서 5세기까지 도읍지
고대로부터 하천은 인간의 주거발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물은 식수, 농업용수, 교통로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집단주거지역은 하천유역에 형성되었으며 그래서 인류문명의 발상지들도 모두 강을 끼고 있습니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삼국이 길항하던 시기에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나 신라의 삼국통일 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동안 이곳은 별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조선의 도읍이 한양으로 옮겨오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한강유역을 두고 삼국이 쟁패하기 전에 백제가 제일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서울이 14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조선의 도읍 한양(漢陽)이었듯이 BC1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도읍이었습니다.
한성백제가 자리 잡은 한강유역은 풍부한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일찍부터 광주평원을 중심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들을 남긴 정치, 문화적인 요충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백제는 이곳 광주평원에서 건국을 하게 됩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10명의 신하들이 왕에게 간하여 아뢰기를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고 있으며 서로는 대해로 막혀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의 지리적 이점은 얻기 어려운 지세로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한수를 끼고 있는 넓은 옥토(北帶漢水 南望沃澤)’인 광주평원은 지금의 송파구, 강동구, 강남구, 서초구 그리고 하남시 일부와 성남시 일대의 넓은 평야입니다. 이곳이 바로 초기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입니다.
서울의 문화유산이 조선시대의 것은 많이 전해지고 있으나 한성백제의 것은 접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최근에 한성백제의 도성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다행히 한성백제의 역사적 향기를 일부분이라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전개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시기구분 작업은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수도(首都)의 이동에 따라 백제시대를 구분해 보면, 기원전 18년에 건국한 이후 475년에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한강유역에 머물렀던 493년간의 한성백제시대(漢城百濟時代), 고구려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죽고 황급히 남하하여 금강유역의 공산성(公山城)에 머물렀던 63년간의 웅진백제시대(熊津百濟時代), 그리고 백제의 전성기이자 패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백마강유역에 정착한 122년간의 사비백제시대(泗沘百濟時代)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부여(夫餘)로부터 떨쳐 나와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하한 온조(溫祖)와 비류(沸流)는 송파구 일대인 한강유역과 인천 문학경기장 근처인 미추홀(彌鄒忽)에 각각 머물렀는데, 온조를 도운 10명의 신하를 내세워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다가 미추홀의 비류가 죽고 그의 백성들이 즐겁게 온조에게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습니다.
남하한 온조 집단은 당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 자리 잡은 마한(馬韓) 연맹체 54국 중에 맹주국인 목지국(目支國)으로부터 100리의 땅을 할양받아 나라를 세운 뒤 미추홀의 비류집단과 지역연맹체를 형성하고 그 세력을 키운 뒤 맹주인 목지국을 병합시킨 후 마한연맹체의 새로운 맹주가 되어 마침내 한성백제의 초기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한성백제의 초기 시기는 5개의 부(部)로 나누어 5부장을 통해 간접 통치하는 5부 체제(五部體制) 형식이었고 왕은 왕성이 있는 직할지만을 통치하였습니다만, 고대국가로 틀이 갖추어지자 늘어나는 인구도 수용하고 방어체제도 강화하기 위해 도성을 건립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평상시엔 풍납토성, 비상시엔 몽촌토성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입니다. 풍납토성은 평지토성으로 평상시에 주거하는 도성이고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비상시에 대비한 산성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아울러 부를 때는 한성(漢城), 위례성(慰禮城), 왕성(王城), 대성(大城)이라 하였고 각각으로 부를 때는 위치에 따라 풍납토성을 북성, 몽촌토성을 남성이라 하여,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산성(丸都山城)과 마찬가지로 남성과 북성의 이성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남쪽으로 남한산성, 동쪽으로 이성산성, 북쪽으로 아차산성, 서쪽으로 삼성리토성의 외곽 방어기지를 갖추기도 하였고, 한강변에는 홍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과 한강을 타고 침략해 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성(蛇城)도 쌓았습니다.
위례성→왕성→한성의 순으로 변해
기록에 따르면 초기백제의 중심지에 대한 명칭이 위례성→왕성→한성의 순으로 변했는데 이것은 세 개의 지명이 뜻하는 의미가 같다는 것입니다.
한성은 ‘큰 성[大城]’의 중국식 표기이고 위례성은 한성을 달리 부른 이름일 것입니다. 위례성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신뢰할 만한 것 중의 하나는 위례가 위리(圍籬)와 음이 비슷하여 ‘울타리’라는 주장으로, 목책을 세워 흙을 쌓아 만든 울타리를 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성 또는 대성이라는 주장으로 위례는 백제어의 어라(於羅)처럼 왕 또는 크다는 뜻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위례성, 왕성, 한성은 같은 곳을 달리 불렀던 이칭(異稱)인 것 같습니다.
최근 발굴 결과 왕성은 풍납토성
그리고 한성에 북성과 남성의 2개의 성이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지금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북성은 풍납토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라고 생각됩니다. 몽촌토성은 왕이 머물렀던 왕성(王城)이고 풍납토성은 백성들의 거주지가 많았던 거민성(居民城)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는데, 최근 풍납토성에서 왕궁 유적이 발굴되어 한성백제시대의 왕성은 한성이라 불렸던 풍납토성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되며 한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도읍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성백제는 한강변에 2개의 도성을 중심으로 그 남쪽으로는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 당시 지배층의 묘역이, 동북쪽으로는 성내동, 천호동, 암사동 일대에 취락지와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풍납토성은 전체의 둘레가 3470m, 높이는 6m에서 15m에 이르고 성벽의 넓이는 30m에서 70m에 이르고 성 밖에는 넓은 해자(垓字)가 둘러쳐져 있는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이었습니다.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정도이며 서벽은 1925년 을축대홍수로 유실되었습니다만 지금은 새로 제방을 쌓아 서벽이 완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 안에는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사기>의 표현을 빌리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집단 취락시설의 주위나 성곽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을 가두어 두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환호(環濠)가 3겹으로 둘러싸여진 모습으로 발굴되었고, 각종 토기류와 꺾쇠, 숫돌 등의 생활유물들도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되었으며 도로의 유구와 석축유구, 생활유구, 수혈 등이 함께 발견되어 왕궁 내에 많은 국가시설물들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환호는 몽촌토성의 해자와는 달리, 군사적인 방어시설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밀집된 주거지역과 외부를 구획 짓는 경계시설로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성 안 전역에 걸쳐 기와, 전돌, 초석 등 고급의 건축자재들이 많이 출토되어 풍납토성 안에 살았던 거주민들은 상당히 높은 계급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합니다.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의 최후의 보루
몽촌토성은 남한산성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의 지형을 이용해 외성과 내성 이중구조로 축조한 독특한 토성으로,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고 필요에 따라 경사면을 급하게 깎는 등 인공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북쪽으로는 목책(木柵)을 세웠으며 그 외곽에 해자를 둘렀는데 해자는 성 밖으로 물길을 내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현재는 연못으로 가꾸어져 있습니다. 성벽의 총길이는 성벽 정상부를 기준으로 서북벽 617m, 동북벽 650m, 서남벽 418m, 동남벽 600m로 총 2285m이고, 동북쪽 외곽에는 외성이 약 270m의 직선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제일 높은 곳의 고도는 42.9m, 대부분의 높이는 30m 이내입니다.
북측의 외곽경사면과 외성지의 정상부에는 목책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나타났고 동측의 외곽 경사면에는 생토를 깎아내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해자를 설치하였던 점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한 기지 구실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저장혈(貯藏穴)의 유구와 망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판축성토대지(版築盛土臺地)와 같은 군사시설들이 발굴되어, 이곳이 왕성이 아니라 위급 시 대피하는 한성백제의 최후의 보루였던 것 같습니다.
몽촌토성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한성시대 백제 시설물로는 적심석(積心石)을 갖추고 있는 지상 건물지 1기, 판축성토대지 1개소,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9기, 저장혈 31기, 저장혈과 유사한 방형유구(方形遺構) 2기, 적심유구 7기, 지당지(池塘址) 2개소 등이 확인되었고, 몽촌토성이 네 곳이 끊겨 있기 때문에 당시 성으로 통하는 문이 4개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곳이 문이 있었던 문지(門址)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석촌동 고분군 중 제일 큰 3호분은 근초고왕 무덤으로 비정
석촌동 고분군은 석촌동과 가락동에 걸쳐 있으며 한성백제 시기의 중심묘역입니다.
일제강점기의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지상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묘가 토축(土築)으로 된 것이 23기, 적석(積石)으로 된 것이 66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은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 7기와 함께 널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등이 30여 기 정도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석촌동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분군 지역에는 3, 4호분과 같은 대형분 이외에도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관리의 것도 섞여 있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되게 형성된 것도 있어서 석촌동 일대는 오랫동안 다양한 계급의 사람의 묘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석촌동 고분군에서 제일 거대한 3호분은 긴 변 45.5m, 짧은 변 43.7m, 높이 4.5m의 규모의 사각형 기단형식의 돌무덤[基壇式積石塚]으로, 기단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 한성백제를 강력한 고대국가로 건설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무덤으로 비정(比定)되기도 합니다.
4호분은 한 변이 23~24m의 정사각형, 연대는 3호분과 비슷한 시기로 보이나 널무덤과 판축기법을 가미하여 순수 고구려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호분의 경우 왕릉급의 대형 쌍분임이 확인되었고 그 쌍분 전통은 압록강유역의 환인현 고력묘자촌에 보이는 이음식 돌무지무덤과 연결되고 있어 백제 지배세력이 고구려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증좌이기도 합니다.
이들 고분은 대체로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약 2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특히 4세기 약 100년 동안은 한성백제 지배세력에 의해 돌무지무덤 위주의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공주로 천도(475년)한 웅진백제 지배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積石塚]에서 돌방무덤[石室墓]으로 바뀌게 되는데 웅진백제 시기의 무령왕릉이 바로 최초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이며 이때부터 왕실의 묘제로 횡혈식석실묘가 정형화되어 삼국시대의 보편적인 왕실의 묘로 자리잡게 됩니다.
삼전도는 조선시대 한강도, 양화도, 노량도와 더불어 4대 도선장
삼전도(三田渡)는 조선시대 한강도, 양화도, 노량도와 더불어 4대 도선장(渡船場)의 하나입니다. 1439년(세종 21)에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나루터 중 하나로 도성으로부터 30리 지점인, 상류의 광나루[廣津]와 하류의 중랑포(中浪浦) 사이에 있었으며 왕십리와 뚝섬 사이에 있는 살곶이다리[箭串橋]를 지나, 신천동과 잠실동이 있는 하중도(河中島)를 건너 송파에 이르도록 뱃길이 마련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강 동부 일대의 교통은 태종 때 설치한 광나루에서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가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다가 태종의 능이 대모산(大母山) 부근에 설치되면서 능행로의 개설이 요구되어 세종 21년 삼전도가 신설되었습니다.
삼전도가 설치되면서 광나루의 기능은 축소되어, 광진별감은 혁파되고 삼전도승이 광진의 업무까지 주관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인근에 송파진이 개설되어 인마(人馬)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조정에서는 송파진에 별장을 배치하고 수어청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병자호란 때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곳이며, 청나라의 전승비이기도 한 삼전도비가 이곳에 세워졌었습니다.
당시 삼전도는 도성에서 남한산성을 가는 나루였고, 광주, 이천, 여주로 가는 길목이며, 영남로를 지나는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교통의 요지로서 주로 사람과 우마(牛馬)가 다녔습니다. 세종 때에는 대모산 아래 현릉으로 가기 위한 나루로도 이용되었는데 처음에는 종9품의 도승(渡丞) 한 명을 두어 이를 관리하였으나 뒤에 별장이 배치되어 어영청(御營廳)이 관할하였습니다.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세워진 곳의 지명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며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그 내용은 청 태종 홍타이지를 찬양하는 글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버티던 인조가 마침내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항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비문은 세 나라의 문자로 씌어 있는데, 비신의 앞면 왼쪽에는 몽골문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당시 이조판서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있던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당대의 명필로 꼽히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전액(篆額)의 글씨는 예조참판이었던 여이징(呂爾徵)이 썼습니다.
이 비는 조선의 모일모화사상(侮日慕華思想) 분위기를 우려한 일본에 의해 땅 속에 파묻혔다가 1895년(고종 32)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복구되었으나 1956년 국치의 기록이라 하여 문교부에 의해 다시 매몰되었다가 장마로 한강이 침식되면서 몸돌이 드러나자 원래의 위치에서 송파 쪽으로 조금 옮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지금은 잠실 롯데호텔월드 옆에 보호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송파진(松坡津)은 가까이에 있는 큰 도선장인 삼전도를 병자호란 이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조정에서는 삼전도승(三田渡丞)을 송파진으로 옮겨 별장으로 하고 수어청(守禦廳)으로 하여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송파진 부근에는 큰 장시(場市)가 서서 객주, 거간을 비롯한 도선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에 따라 송파진의 역할도 커져 9척의 진선(津船)으로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으며 송파진 별장은 인근의 광진, 삼전도, 신천진까지 관장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카페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10월)를 확인 바랍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실내 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프레시안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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