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원칙을 뼈대로..'사용자의 이로움'을 강구한 공간설계[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022. 9. 20.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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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지순 전 간삼건축사사무소 상임고문, 집과 기업을 아우르는 경영의 건축
포스코센터, 1995. 목천건축아카이브(원정수 & 지순 기증) 제공
‘한국 여성 건축사 1호’로 남편 원정수와 간삼건축 이끌어…포스코센터·한국은행 등 시대의 상징적 건물 설계
‘스타 건축가’ 삶보다 ‘전문적 파트너’ 역할 중시…주거학 연구 통해 ‘근대 부엌 진화’ 큰 업적 남겨

서울 테헤란로에 위치한 포스코센터는 1990년대 한국 최고의 첨단 빌딩이었다. 국내 1세대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당시 최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전산과 설비 분야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했다. 30층 동관과 20층 서관 두 동을 연결하는 아트리움은 실내지만 탁 트인 활기찬 거리 같다. 포항제철(포스코) 사옥답게 철골 뼈대가 시원스레 드러난다. 아트리움 아래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투명 엘리베이터의 움직임이 리듬감 있다. 로비에 백남준 작가의 비디오 작품까지 어우러져 예술적 정취마저 느껴진다.

지금 시각에서 30년 가까이 나이 먹은 이 건물을 보면 과거에 누린 첨단의 위상은 다소 사라진 듯하다. 이보다 더 크고 성능이 뛰어난 빌딩은 많다. 하지만 입장을 제한하는 각종 장치와 반짝이는 매끈함만 가득한 폐쇄적인 오피스 건물의 로비 공간과는 다르다. 포스코센터는 사무용 건물이지만 시민을 반기는 환대의 느낌이 가득하다. 비슷한 외관의 건물들이 많은 강남 일대에서 이곳은 몸에 밴 품격 있는 우아함을 드러낸다. 입구에 놓인 준공석이 그간 쌓인 시간의 출처를 담담하게 알려준다. 설계사 이름에는 간삼건축과 포스에이씨(POS A.C)가 새겨있다.

한국 여성 건축사 1호의 삶

고 지순 전 간삼건축 상임고문(1935~2021)은 포스코센터 건축 설계의 대표 건축가다. 건립 당시 간삼건축의 대표이사로 참여했다. 그는 1965년 여성 최초로 건축사 시험에 합격한 한국 여성 건축사 1호다. 그는 남편인 고 원정수 건축가(1934~2021)와 협력하여 60년 가까이 활동해온 한국 건축계의 대모였다. 최근 젊은 건축가 사이에서 종종 보이는 ‘부부 건축가’의 원조다.

지순은 1958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구조사건축설계기술소와 한국토지주택공사 전신인 대한주택영단에서 실무를 했다. 그는 건축사 자격 취득을 계기로 1969년 자신의 독립 사무소인 일양건축을 설립했다. 1990년 이전까지 건축사 시험에 합격한 여성 건축가는 총 23명에 불과했다. 정식으로 면허를 딴 건축가지만 공사 현장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던 시절에 사무소를 열었다. 지순과 원정수는 한국 최초의 부부 건축가 전시인 ‘원·지 건축전’(1971)으로 일양건축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은행 본점 빌딩 설계를 계기로 사무소를 확장, 재정비했다. 1983년 원정수, 이범재, 김자호, 이광만과 함께 공동으로 간삼건축을 창립했다. 현재 700여명의 직원을 둔 간삼건축은 매출 순위 국내 10대 설계사 중 하나로 성장했다.

서울 평창동 주택, 1979.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한 건축 여정

지순의 건축 여정은 한국전쟁, 국가 재건과 서울 올림픽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동행한다. 지순뿐만 아니라 개인 삶이 국가 전망 속에 있던 1930년대생 한국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는 대학 교육보다 전쟁 복구를 조금씩 해가던 현장에서 건축을 배워가야 했다. 현대 건축의 선진 기지였던 일본과 프랑스에서 공부한 당대 스타 건축가 김수근, 김중업과도 상황이 달랐다. 국내파였던 지순과 원정수는 한국 사회의 절박함을 더 절실히 느꼈다. 산업과 기술의 한계도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이 실무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산업 건축 자재로 벽돌과 시멘트 블록밖에 없던 때였다.

반면 건축사학자 전봉희의 말대로 이들은 “한국의 전후 사회 체제가 배출한 첫 번째 세대”로, “이어지는 고도 경제 성장기의 새로운 체제의 리더로서 왕성하고 풍요로운 건축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행운의 세대”이다. 지순도 분명 이 흐름을 탔다. 주택 중심의 소규모 설계 공방에서 기업 건축주를 둔 대형 설계사무소로 조직을 키우고 작업을 확장해갔다.

간삼건축 시절 지순의 대표작인 한국은행 본점(1987)과 포스코센터(1995)는 규모와 기능 면에서 한국 건축사의 중요한 작업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작가 개인보다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원했던 건축가의 뜻에 따라 지순의 이름은 덜 알려져 있다. 간삼건축이라는 사명 또한 ‘사이(間:간)’의 파트너십을 강조한다. 지순은 “스타 건축가보다 파트너로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을 중시했다. 그는 시대에 적절한 재료를 선정하고 그에 맞는 기술로 현실 참여적인 건물을 짓는 데 힘썼다. 공간의 미학보다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로움을 더 강구했다. 돌을 사용한 한국은행 본점과 철과 유리를 사용한 포스코센터는 각각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사회 이상과 사용자 존중이 반영된 건축이다.

서울 안암동 주택, 1977.

집과 부엌, 건축의 중심을 생각하다

이처럼 시대를 상징하는 큰 건물들을 설계한 지순이지만, 그는 자기 작업의 뿌리가 ‘집’에 있다고 말해왔다. 그는 대한주택영단에서 판잣집과 한옥 일색이던 주거 현실이 첨단 시설이었던 ‘아파트’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했다. 일양건축 시절에는 ‘양옥’이라고 불린 단독주택들을 여러 채 설계하면서 현대적인 생활공간을 조직했다. 지순은 이처럼 새로운 삶의 형식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일을 건축이라 보았다.

제대로 된 주거 공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1960년대 주택 문제는 젊은 여성 건축가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한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실무에 참여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1962년 준공식을 올린 마포아파트는 “생활개혁과 공동생활의 훈련을 도모하기 위해” 건설했던 파격적인 주거 시설이었다. 주택영단 건축과 기사로 마포아파트 설계에 참여했던 그는 ‘여성이 건축가로 산다는 것’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마포에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입주자들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남을 관찰할 수 있었다. 공동생활에 대한 태도와 생활 습관이 설계 결과에 의하여 놀랄 만큼 변해가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 주택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 건축가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한창 주택 작업을 진행하던 지순은 1971년 연세대학교 주생활학과(현 실내건축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91년 퇴임까지 그는 건축 실무와 주거 연구를 20년간 병행했다. 지순은 일반적인 가정대학과는 차별화된 강의를 했다. 공간과 환경 문제를 주제 삼은 건축적 관점의 주거학이 학과에 자리 잡도록 힘썼다. 특히 지순은 주택 연구에서 부엌에 관심을 쏟았다. 가구회사 한샘의 지원을 받아 도시와 농촌 부엌의 개선과 표준화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부엌은 단순히 여성의 노동 장소가 아니라 건축적인 측면에서 과학적 경영론이 도입된 공간이다. 건축사학자 도연정은 <근대 부엌의 탄생과 이면>에서 “부엌은 주거 안에서도 가장 기능적인 공간으로써 근대적 개념이 발현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평범한 입식 부엌은 지난 몇십 년간 한국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진화해온 건축 공간이다. 지순은 부엌 연구를 통해 사회제도와 공간 경영의 힘을 체험했다.

건축의 기본 단위인 집, 그 집 안에서도 핵심인 부엌 연구를 통해 그는 건축의 중심에 다가서고자 했다. 무엇보다 그는 건축가인 동시에 누구보다 부엌을 많이 이용하는 생활인이었다. 지순에게는 “생활의 원칙이 곧 건축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념이 있었다.

경영의 건축, 건축의 경영

부부 건축가로 일해온 지순은 회사 조직이 커지면서 주로 경영과 관리에 힘썼다. 남편인 원정수가 설계 아이디어를 내고 디자인에 집중하면, 지순은 이를 실제로 구현할 때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어쩌면 이러한 업무 분담은 건축과 가정의 양립을 강조했던 지순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경영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일을 단순한 건축의 보조 차원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건축은 개인의 창의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는 대형 건물을 설계할 때 더욱 전문적인 조율과 관리, 현실에 기반한 대처가 필요하다. 사회에 누적되는 수많은 데이터를 읽고 여러 전문 협업자들과 작업해야 하는 최근 건축 경향을 생각할 때 이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지순은 경영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과 큰 단위인 회사를 오가며 균형점을 찾고자 했다. 밥을 차려 먹이는 일과 업무를 관리하는 일이 함께 중요했다. 사소한 일례지만 지순의 경영 원칙에 따라 간삼건축은 한 번도 직원 월급이 밀린 적 없다고 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지만 부침이 컸던 과거 한국 설계 시장에서 쉽지만은 않았던 일이다.

지순

지순 건축가의 1주기를 기리며

가정이란 집과 도시를 위한 집을 함께 꾸려간 건축가는 2021년 9월21일 정확히 오늘로부터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은 특히 여러 여성 건축가들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겼다. 여성 건축사 1호로서 양지회관(1965), 대한어머니회관(1973), 여성공동의장(1995) 등 여성을 위한 공간들을 직접 설계하고 한국여성건축가협회를 이끌었던 그의 부재가 크다. 이제 몇 배나 많은 여성 건축사가 배출되고 활동도 훨씬 활발해졌지만 이들의 실천이 알맞은 언어로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생전 고인을 만난 적 없는 나는 그의 지난 시간을 알기 위해 저술과 기고문뿐만 아니라 <원정수·지순 구술집>을 비롯, 여러 자료들을 찾고 공부했다. 목천건축아카이브가 소장한 두 건축가의 자료도 살펴봤다. 짐작한 대로 부부 건축가의 기록에서 부인의 기록은 다소 부족했다. 나는 그의 자취를 좀 더 알고 싶어 도움을 얻고자 서울 장충동에 있는 간삼건축을 방문했다. 간삼건축 사옥은 차분한 주택가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몇백 명이 일하는 큰 회사의 사옥치고 집 같은 모습이 의외였다. 하지만 이내 동네의 여러 건물들을 잇고 연결해서 쓰는 이곳 풍경이 지순 건축가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건축가로 머물렀던 마지막 장소가 고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해서 나는 안도했다. “(…) 같이 협조하고 살고 싶어요. 그것뿐입니다.”

■정다영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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