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 칼럼] 자기기만의 정치, 쌀값

2022. 9. 20. 1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규화 논설실장

50대 아래 세대에게는 전설 같은 얘기지만 '혼식(混食)검사'라는 게 있었다. 60·70년대 학교 교실에서는 점심시간에 선생님에게 도시락을 검사 맡아야 했다. 보리쌀이나 잡곡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검사에 통과하기 위해 친구 도시락에서 보리쌀과 콩, 심지어 조까지 꿔 오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정부가 부족한 쌀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펴던 일이다. 같은 시기에 밀가루로 만든 분식(粉食)이 권장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거의 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 학생들이 흰쌀밥을 싸왔기에 규정을 지킨 '모범학생'에게 보리쌀을 꿔 와야 했던 사태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쌀은 이미 모자라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가 다수확 벼품종 개발에 성공하면서다. 분식에 맛들인 중산층에서는 이때 토스트나 샌드위치가 조식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밀수입이 폭발적 증가 조짐을 보이는데, 다른 쪽에선 '무미일'이라며 쌀을 줄이고 분식하는 캠페인이 이어졌다. 출산율 하락을 예상하지 못하고 가족계획 캠페인을 너무 늦게까지 하는 바람에 출산 기피 현상에 영향을 준 것처럼, 혼·분식 권장은 후에 쌀 소비 감소로 이어지는데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쌀이 지금은 천덕꾸러기다. 정부가 남아도는 쌀을 사서 저장하는 데만 1년에 1000억 원 이상이 들어간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8월말까지 쌀값 안정을 위해 쌀을 구입하는 데에 7900억 원을 투입했다. 현재 작년 생산 분을 포함해 정부의 쌀 비축량은 105만 톤에 달한다. 농협 등 민간 추산 비축량 40만 톤을 포함하면 현재 국내 창고에 쌀 150만 톤이 저장돼있다. 작년 기준 우리나라의 쌀 소비량은 주식용 299만 톤, 가공용 65만 톤으로 364만 톤이다. 반면 생산량은 388만톤이었다. 올해도 이 정도 수확이 예상된다. 24만 톤가량이 과잉이다. 그런데 갈수록 쌀 소비량은 줄어들고 있다. 전국한우협회의 지난 15일 통계에 따르면 올해 우리 국민 1인당 육류 소비량은 56.5㎏인데 비해 쌀 소비량은 54.8㎏으로 예측됐다. 우리 국민들이 고기보다도 쌀을 덜 먹는다는 것이다.

현재 80㎏ 쌀 한 가마당 가격은 15만~16만 원 사이에 형성돼 있다. 2년 전 24만 원이 넘었던 때와 비교하면 35% 폭락이다. 그 전 해 거의 40년만의 흉작에다 코로나19로 식량안보의 경각심이 대두하면서 쌀값을 밀어 올렸다. 쌀생산 농민들의 상실감은 클 수밖에 없다. 농민들은 쌀을 매입해(시장격리) 쌀값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기회를 민주당이 놓칠 리 없다. 지난 15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소위에서 민주당은 양곡관리법을 단독 처리해 정부가 의무적으로 시장격리를 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입법까진 남은 관문이 있지만, 민주당은 강행처리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당연히 이재명 대표에게 공이 헌정됐다. 그가 최고위원회에서 "시장격리제도가 있는데 정부가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한 직후 단독 처리가 이뤄졌다. 이 대표는 법안 통과 후 농민 관련 단체나 행사에 갈 때마다 민주당이 농민의 이익을 지켰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의 주장처럼 정부가 시장격리를 안 한 게 아니다. 올 들어 벌써 세 차례에 걸쳐 8000억 원 가까운 자금을 썼다. 정부와 여당이 우려하는 점은 쌀값이 떨어질 때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가격을 유지하면 쌀 수급조절은 아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타 작물에 비해 노동투입량이 적은 쌀 생산을 늘릴 것이다. 사태는 더 악화되고 장기적으로 그 피해는 농민에게 돌아간다. 이 점을 민주당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당이라고 앞뒤 안 재고 '질러대는' 건 자기기만이다.

재정을 투입하는 기존 방식의 쌀값 유지정책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제 전반적인 농업 경쟁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식량안보, 중요하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식량은 '달러'가 있으면 얼마든지 사올 수 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며 이 점은 더 분명해졌다. 곤란을 겪은 것은 빈국들이었다.

차제에 수백 년 골수에 박힌 '경자유전의 원칙'도 폐기해야 한다. 현실에선 이미 실종됐다. 농지의 절반가량이 비영농인이 보유하고 있고 농지의 70%가 임차농이다. 도심 빌딩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21세기에, 신분제 지주제 하에서 착취당하는 소작농을 상상하며 경자유전의 원칙을 헌법에 넣어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대선후보 시절 경자유전의 원칙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며 농지법도 현실에 맞게 손봐야 한다고 했다가 집단적 비난을 받았다. 반면 뜻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오랜만의 신선한 발상이라는 지지를 얻었다. 윤석열 정부는 양곡관리법 논란을 계기로 농업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하기 바란다. 그게 진정으로 농업·농민을 위하는 길이다. 논설실장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