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게 그려진 '사회적 을들' 해상도 높이고 싶었죠"

강성만 2022. 9. 2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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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미술 에세이집 낸 이유리 작가
이유리 작가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제 책이 ‘사회적 을’들을 가시화하는 매개가 되면 좋겠어요. 사회적 을들이 블러(blur, 흐릿하단 뜻) 처리 돼 잘 드러나지 않잖아요. 사회적 을들의 해상도를 높여야죠.”

<한겨레>에 올해로 5년째 그림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 이유리 작가는 잘 나가는 미술책 저자이자 강사이다. 그가 2016년 낸 <화가의 마지막 그림>은 만 권 이상 팔렸고 남편(<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저자 임승수 작가)과 연애하면서 함께 쓴 첫 책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2009)도 1만4천권가량 나갔단다. 강연 요청도 꾸준히 늘어 요즘은 많을 땐 한 달에 10여 차례 청중과 만난다.

최근 <한겨레> 연재물을 모아 미술 에세이집 <기울어진 미술관>(한겨레출판)을 낸 저자를 지난 15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전작인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한겨레출판) 출간 이후 2년 만에 낸 이 책은 그가 미술을 주제로 쓴 다섯번 째 단독 저서다.

<기울어진 미술관> 표지.

전작이 그림에 재현된 여성의 모습과 여성에 가해진 폭력에 주목했다면 이번 책은 그 대상을 여성을 포함해 장애인과 성소수자, 도시빈민, 흑인 그리고 동물까지로 넓혔다. 서양미술사의 위대한 화가인 마네와 루벤스, 잭슨 폴록 등의 작품에서 “희미하게 처리된 사회적 을들의 해상도를 높이려 한 것”이다.

그는 책에서 시각 장애인 여성을 순결하게 그린 영국 작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눈먼 소녀>(1856)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미술의 한 예로 소개했다. 서양 미술에서 장애인은 순결한 소녀 이미지처럼 대중이 편안하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기이한 구경거리로 소비되는 방식이 아니면 등장하기 힘들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가 보기에 마네의 걸작 <올랭피아>(1863)와 루벤스 작품 <거울을 보는 비너스>(1615)에 나오는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그는 1930년 48살 나이에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덴마크 화가 릴리 엘베와 끝내 성소수자성을 감춘 르네상스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삶을 함께 살피면서 “‘정상성’이라는 커버 따위 필요 없는 세상은 언제쯤 도래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던졌다. 얼굴이 뭉개지거나 푸념하는 모습으로 여성을 그려 ‘여성 혐오자’라는 비판도 받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드가의 그림을 두고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지 않고 현실 속의 인간으로 대한 증거가 아닌가”라며 화가를 옹호했다.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 관계와 그에 따라 발생하는 부조리를 그림을 매개로 풀려고 했죠.” 책을 쓴 의도를 이렇게 밝힌 그는 자신의 글이 “기울어진 판에서 소외된 사회적 을에게 한 줄기 햇살이 되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림을 보는 것은 그걸 낳은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죠. 작가의 영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서양 중세에는 기독교, 그 뒤에는 백인 남성 위주의 세계관이 그림에 강하게 투영되어 있어요. 이런 주류의 시선이 놓친 것을 써 보고 싶었죠.”

미술 작가로서 저자의 강한 개성은 지금 이 시대 현실에 대한 큰 관심이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은 마치 그림이 등장하는 사회비평 칼럼 같기도 하다. 사회와 사상을 아우르는 폭넓은 독서 체험이 글의 바탕을 이루는 것도 남다른 점이다.

다섯번째 저서 ‘기울어진 미술관’
5년째 ‘한겨레’ 연재해온 글 모아

장애인 성소수자 빈민 흑인 동물 등
중세 기독교·백인 남성 시각 ‘투영’
“주류의 시선이 놓친 모습들 발견”
“나도 갑일 수 있다는 생각 했으면”

그는 “그림 공부를 시작하고는 한 화가를 위대하다거나 혹은 쓰레기라는 이분법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는 미술사에 쓰인 대로 너무 일면적으로 그림을 봤어요. 입체적, 다면적으로 보지 않고요.” 피카소를 예로 들었다. “피카소는 사회적 불평등에 분노한 공산주의자이자 파시즘에 저항한 진보주의자였지만 한 편으로는 ‘그루밍(길들이기) 성폭력’ 가해자이죠. 둘을 함께 봐야죠.”

그는 대학 역사학과를 나와 잠시 기자 생활도 했다. 어떻게 미술 저술가가 되었을까? “중·고교 다닐 때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역사를 전공하거나 기자가 된 것도 그 때문이죠. 진보적 사회 의식은 대학 때 페미니즘 운동을 하며 갖게 되었죠. 그때부터 막연히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한 그림을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서 글로 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기자 시절 만난 남편과 공동 기획한 책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이 운 좋게 출판 지원을 받으면서 작가의 꿈을 이뤘어요.”

그는 첫 책의 성공에 힘입어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남편도 저에게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줬죠. 남편과 저는 서로 글쓰기에 대해 압박하는 상사이자 든든한 동료이죠. 맘에 안 들면 가차 없이 깝니다. 망한 글이라고요. 부부는 경제공동체잖아요. 상대 평가를 무겁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하하.”

삶과 예술을 일치시켰다는 점에서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를 가장 좋아한다는 저자에게 미술을 좀 더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수영도 배우려면 먼저 물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미술도 같아요. 어려워하지 말고 먼저 그림을 많이 보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나만의 시선으로 그림을 해석할 수 있죠.” 이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학생 때 런던에서 어학 연수를 하면서 저만의 그림 보는 근육을 키운 것 같아요. 그때 그림에 대해 교양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런던의 갤러리를 훑고 다녔어요. 만약 미술 지식을 꽉 채우고 그림을 봤다면 그 지식의 한도 안에서만 봤겠죠.”

그는 개인의 그림 향유가 결과적으로 사회의 개선으로 이어지길 바란다는 마음도 밝혔다. “많이 보다보면 어느 순간 불편한 그림을 만날 겁니다. 예컨대 이번 책에 나오는 <푸줏간>(1551) 같은 고기 그림이 그럴지 모르죠. 그 순간 불편하다고 지나치지 말고 왜 그게 불편한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 어떨까요. 동물들 시각에서는 인간이 갑이잖아요. 이 그림을 보면서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내가 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불편한 마음이 내 안의 어떤 것을 건드려 사회 개선으로까지 이어지면 좋겠어요. 저도 이번에 동물권 글을 쓰면서 고기를 끊었어요. 페스코(생선은 섭취) 채식주의자가 되었죠.”

계획은? “장기적으로 동양미술과 한국미술을 대중화하는 책을 써보고 싶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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