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의 부여 정벌

임기환 2022. 9. 2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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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58] 주몽왕과 유리왕은 의제적 부자관계로 만들어졌으며, 실제는 유리왕이 주몽왕과는 다른 또 다른 왕계의 시조라는 견해를 소개했다. 그리고 유리왕과 대무신왕의 관계도 주몽왕과 유리왕의 관계처럼 의제적인 부자관계로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면 대무신왕은 주몽왕 왕계에 속하는가? 유리왕 왕계에 속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왕계의 시조쯤 되는 인물인가?

유리왕을 또 다른 왕계의 시조가 보는 근거로 유리전승에서 선사(善射)의 재능, 부여에서 남하한 점, 3인으로 대표되는 세력을 이끌고 내려온 점 등이 주몽전승의 기본 요소와 서로 겹치는 등 독자적인 시조전승의 면모를 갖고 있다고 파악했다. 또 유리왕이 국내(國內)로 천도했다고 하는데, 이는 천도라기보다는 국내에 도읍한 건국적 성격을 갖는 점을 고려했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서 대무신왕 관련 기사를 보면 이와 같은 시조적 성격을 추론할 수 있는 전승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무신왕은 주몽 및 유리왕과 연결되는 전승을 갖고 있다. 바로 부여와의 관계이다. 그리고 주몽전승이나 유리전승과는 달리 부여로부터 남하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부여를 정벌하는 측면이다. 이 점에서 일단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 전승은 주몽이나 유리왕의 부여 남하 이야기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에서 가장 큰 공훈은 곧 부여왕 대소(帶素)의 죽임이다. 부여왕 대소는 동부여 금와왕 일곱 아들의 첫째로서 주몽을 시기하고 죽이려고 해서,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몽전승에는 주몽의 상대로서 대소 왕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유리왕 부여 남하 전승에는 유리는 아버지 주몽을 찾으러 부여를 벗어났을 뿐이지, 부여왕 대소의 존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유리왕이 즉위한 이후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유리왕을 협박하거나, 또 부여군이 고구려를 침공한 기사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잠시 그 내용을 살펴보자.

유리왕 재위 14년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볼모를 교환할 것을 요구하자, 유리왕이 굴복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보내고자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며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왕이 5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공하다가 큰 눈이 내려 후퇴하였다.

유리왕 28년에는 부여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지 못한다고 유리왕을 질책하자 유리왕은 굴복하고자 하였으나, 이때 왕자 무휼(撫恤·대무신왕)이 부여 사신을 만나 오히려 대소왕에게 경고의 뜻을 전하였다. 이때 무휼의 나이가 8세였다. 또 유리왕 32년 11월에 부여군이 침공해오자 10세인 왕자 무휼이 적은 군사로 복병을 써서 부여군을 물리쳤다.

이처럼 유리왕의 재위 기간에 부여 대소왕과의 관계를 전하는 기사가 3차례 등장하지만, 유리왕은 소극적이고 위축된 태도이고, 오히려 어린 왕자 무휼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군사를 지휘하여 부여 침공군을 물리치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유리왕대 부여 관련 기사의 실제적인 주인공은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의 왕자 무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왕호 그대로 '武神', 즉 군사에 있어서 신이한 능력을 발휘했음을 당시 고구려인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8살, 10살의 나이로 그런 능력을 보였다는 위 기사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런 기사는 주몽왕이나 유리왕이 갖고 있던 선사(善射)의 능력이 대무신왕의 경우에는 군사를 부리는 능력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대무신왕이 주몽왕이나 유리왕을 계승한 영웅적인 인물로 인식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런데 주몽왕과 유리왕을 서로 다른 왕계로 볼 때 대무신왕은 과연 어느 왕계일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록 왕계상으로는 유리왕의 왕자로 나오지만, 이는 의제적인 부자관계로서 이에 얽매이지 않고, 기사의 맥락이나 분위기로 파악하는 게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부여 대소왕과의 관계를 보면 유리왕보다는 주몽왕과 연결 짓는 게 좀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비류국왕 송양의 딸이라는 점도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겠다. 비류국왕 송양에 대해서는 그동안 따로 언급할 기회가 없었다. 주몽전승에 의하면 송양은 고구려 지역에서 주몽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비류국 왕이었다.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졸본땅에서 나라를 세운 뒤에 송양과 세력을 다투었는데, 주몽이 뛰어난 활솜씨로 송양을 제압하고 복속시켰다고 한다. 주몽이 송양왕과 권능을 겨루는 이야기는 주몽전승에서 중요한 내러티브의 하나이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무신왕의 출생년을 따지자면 결코 송씨가 어머니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왜 굳이 대무신왕의 어머니를 송씨라고 하였을까? 이는 이 지역의 중심 세력인 주몽왕의 혈통과 송양왕의 혈통을 모두 잇는 인물로 대무신왕의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정치적 의도라고 짐작한다. 비류국 왕 송양이 주몽전승에 등장하는 주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굳이 그의 딸인 송씨를 어머니로 하는 대무신왕은 아무래도 주몽왕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무신왕을 유리왕과 의제적인 부자관계로 만들면서 대무신왕의 어머니 송씨가 자연스레 유리왕비가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3, 4년조 부여정벌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sg_014r&begin=sg_c_014_0001)
대무신왕은 즉위한 후 4년 12월 겨울에 부여를 정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 전승도 널리 알려져 있어서 독자분들도 그 줄거리 정도는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 부여 정벌 전승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대무신왕이 정벌하러 가면서 신이한 기물과 인물, 말 등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군사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었는데 지금 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겠습니다."

[왕은]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리므로, 날이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여,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은] "하늘이 준 것이다." 하고 절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왕에게 절하며 말하였다.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따라가서 부여 왕의 머리를 베어 오기를 청합니다."

왕이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떠나면서 비류수에서는 신이한 솥과 부정씨라는 인물, 이물림이라는 곳에서는 금도장[金璽]과 병기, 그리고 북명인 괴유와 적곡인 마로라는 인물을 얻는다. 그리고 이미 재위 3년에 골구천에서 신마(神馬) 거루(駏䮫)를 얻은 바 있었다. 이러한 신물과 인물들은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이 정당성을 갖는 군사 행동임을 보장하는 것이다. 특히 금도장[金璽]은 대무신왕의 왕권이 천명(天命)을 받았음을 상징하는 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부정씨와 괴유, 마로 세 사람은 주몽왕과 유리왕이 부여에서 남하할 때 거느린 3인의 존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위 이야기를 거꾸로 읽으면 만약 대무신왕이 부여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에 이러한 인물과 신물을 얻지 못했으면 과연 전쟁의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런 인물들을 얻었음에도 비록 대소왕의 목을 베었지만 대무신왕의 군사는 부여군에 포위되어 곤욕을 치르다가 퇴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뒤에 이어지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왕은 나라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바랐다.

이 내용은 대무신왕이 단지 신성한 힘에만 힘입지 않고 덕성과 의로움을 갖춘 진정한 왕자(王者)다운 풍모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인 신성한 존재인 주몽으로부터 이어지는 혈통이 대무신왕에게서는 신성성 그 자체보다는 하늘의 뜻을 구현하는 왕자관(王者觀)을 갖춘 인간으로서의 풍모가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면은 부여 정벌 과정에서 완성되었던 셈이다.

주몽의 탄생과 부여 왕자 대소와의 갈등으로 시작되는 내러티브는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과 대소의 죽음으로 종결된다. 그 사이에 계보상으로는 유리왕이 있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리왕은 적어도 부여와의 관계에서는 한발 뒤로 물러나 있고 왕지 무휼[대무신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형국이다. 이와 같이 대소왕과 관련된 전승의 맥락에서도 주몽왕에서 대무신왕으로 이어지는 왕계를 상정할 수 있겠다. 동명왕의 사당[東明王廟]를 세운 때가 유리왕이 아니라 대무신왕 재위 3년이라는 점도 이런 왕계의 맥락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고구려 주몽전승으로부터 대무신왕의 정벌로 이어지는 내러티브의 조연인 대소왕이 통치한 부여의 존재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살펴보겠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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