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농락당하는 윤석열식 외교 / 박현

박현 2022. 9. 2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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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아침햇발]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5월20일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 두번째),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왼쪽 첫번째) 등과 함께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방문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현 | 논설위원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처음부터 좀 튀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지난해 9월 백악관이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에 고객 정보를 내놓을 것을 요구할 때 총대를 멨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협조하지 않으면 강제로 수집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올해 들어서도 그는 대중국 견제와 미국 제조업 부활이라는 바이든 책략의 사실상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수출통제 리스트에 중국 기업 100개 이상을 추가하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창설에 앞장섰다. 한술 더 떠 한국 투자를 검토하던 대만 반도체 기업 글로벌웨이퍼스를 중간에 가로채기도 했다. 그는 올해 6월 이 회사 대표와 1시간 동안 전화통화를 통해 투자처를 미국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로드아일랜드 주지사 출신으로 대권 야망도 갖고 있다는 그는 자유무역을 주창해온 기존 상무장관들과는 결이 많이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찌됐든 바이든 대통령에겐 ‘스타 장관’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우리나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나 통상교섭본부장은 존재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최근 미국의 한국산 전기차 차별대우 문제가 불거진 뒤에야 ‘뒷북 대응’하느라 분주하다. 이에 대해 산업부 고위관계자는 300페이지가 넘는 법안(‘인플레 감축법’)을 분석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유럽연합(EU)·일본도 비슷한 처지라는 점을 거론하며 할 만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조항은 이미 지난해부터 논란이 됐던 터라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사태 파악에 하루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내 전기차 판매 2위로 순위가 뒤처진 유럽연합·일본에 견줘 피해가 훨씬 크다. 피해가 큰 당사국이 가장 열심히 뛰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 지난 7월27일 법안 최종안이 공개됐을 때 신속히 파악해 국내에 보고했다면, 때마침 방한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실이 혼돈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일선 부처들도 기강이 해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사이 현대·기아차는 바이든의 투자 요청에 무려 100억달러 이상을 약속하면서도 홀대를 당하는 처지다. 현대·기아차의 이런 투자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 수혜를 전제로 계획한 것으로 알려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스타 장관들이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바이든의 ‘스타 장관’에게 판판이 깨지는 형국이다.

문제는 기강 해이 차원을 넘어 현 정부에 과연 이 난국을 헤쳐나갈 전략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미국은 동맹·우방국들을 경제안보라는 기치 하에 자신이 주도하는 경제블록 안에 묶어 패권 도전국인 중국을 약화시키는 한편으로 자국 제조업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우리 같은 개방형 통상국가엔 이런 보호무역주의가 매우 불리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미-중간 첨단기술 분야 교역이 중단되는 ‘기술 디커플링(분리)’이 현실화할 경우 미·중과 한국·일본·유럽연합·인도 등 6개국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추정했다. 우리는 미-중 디커플링 시에도 두 경제블록과 모두 교역이 허용될 경우 국내총생산(GDP)이 소폭 증가했다. 우리가 중국을 대체하는 어부지리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같은 블록 내에서만 교역이 허용될 경우엔 국내총생산 감소율이 6%에 달해 충격이 경쟁국 중에서 가장 컸다. 감소 규모가 일본의 2배나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일찌기 ‘논두렁론’으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안보 면에서는 미국이 중요하고, 경제는 양쪽 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도랑에 든 송아지와 마찬가지입니다. 양쪽 언덕의 풀을 뜯어 먹거든요. 주변에 있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다 활용해야 해요.” 지금 같은 강대국간 대립 시기에는 논두렁론이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지만 기회는 열려 있다.

1980년대 중후반 미-일간 산업패권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미국은 당시 자국 산업을 추월하려던 일본을 주저앉히고자 플라자 합의와 미-일 반도체협정을 맺었다. 어찌보면 지금과 유사한 면이 있다. 당시 우리 기업들은 일본 기업들이 주춤하는 사이 새롭게 열린 중국 시장을 발판삼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의 미-중 대립 시기도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활로를 찾을 수 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사다리 걷어차기’ 시도는 중국의 무서운 추격을 지연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이런 기회에 새로운 성장동력인 동남아·서남아시아 시장을 개척하는 등 세계시장의 입지를 넓여나가야 할 것이다. 미-중 대립은 장기전을 띨 공산이 크기 때문에 초기 단계에서 룰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기업들의 지위가 크게 위협받을 것이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미국 시장에서의 공정한 대우와 대중국 시장 접근권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더이상 미국에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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