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째 '시행령 통치'..막을 방법 없나

이효상 기자 2022. 9. 2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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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완박’까지 번복 처리…삼권분립 뒤흔들어

[주간경향]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룰(rule)’을 정할 권한은 어디에 있을까. 제헌헌법부터 모든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법률을 실제로 시행하는 데 필요한 세부 규정은 대통령이나 행정부가 정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 대통령령, 부령 등 이른바 행정입법이다. 법률에서 모든 사항을 규정하기 어렵고, 사회상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필요성도 있어 행정부에 일부 권한을 위임했다.

집행하는 행정부가 룰을 만드는 데까지 관여하면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 때부터 나왔다. 법체계상 하위법인 행정부의 명령이 국회가 만든 법률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제헌헌법 초안을 논의하기 위해 1948년 6월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법조인 출신 서순영 의원은 정부가 광범위한 부입법권(대통령령·부령 등)을 보유한 점, 법률안 제출권을 정부도 가지고 있는 점 등을 들어 국회와 정부의 권한 불균형을 우려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8월 11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실에서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개정안 관련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70년이 넘게 이어진 입법권을 둘러싼 논란이 윤석열 정부 들어 다시 전면에 부상했다. 5월 10일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지난 4개월간 국회를 거치지 않는 행정입법으로 주요 국정과제를 추진했다. 시작은 고위공직자 인사검증 체계 개편이었다.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폐지를 공약했던 윤석열 정부는 민정수석실의 인사검증 기능을 법무부로 이관하는 대통령령 개정안을 내놨다.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이 인사를 추천하면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1차로 검증하고,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이 최종 검증한다는 것이 골자다.

정부 부처의 직무범위를 정한 정부조직법 개정이 아니라 국회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해 정부 기능을 재편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됐다. 정남철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본질적인 사항은 의회가 법률에서 정하도록 하는 법률 유보의 원칙이 있다. 인사검증의 경우는 개인정보나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을 수 있는데 시행령에만 근거를 두고 조직을 만드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법무부 인사 검증·경찰국 신설

행정입법은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 산물이 아닌 만큼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공중의 의견수렴과 법제처의 심사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이 절차를 형해화하면서 발생했다. 법무부에 인사정보관리단을 신설하는 시행령은 입법예고부터 공포까지 단 2주 만에 모든 절차를 마무리했다. 지난 5월 24일 입법예고 후, 이튿날인 25일까지 입법예고 기간을 뒀고 26일 법제처 심사를 거쳐 27일과 31일에는 각각 차관회의,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행정절차법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40일 이상의 입법예고 기간을 둬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치도록 하고 있는데 이를 이틀 만에 처리했다. 법체계 정합성 등을 따져봐야 할 법제처는 하루 만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면서 개정령안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완규 법제처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사법연수원 동기로, 검찰총장 시절 윤 대통령의 징계취소 소송에서 윤 대통령을 변호했다.

행정안전부의 경찰국 신설 문제도 시행령 개정을 통해 밀어붙이면서 ‘시행령 통치’라는 비판을 샀다. 비판론자들은 정부조직법이 정한 행정안전부의 사무에 ‘지방자치제도’, ‘지자체 간 분쟁조정’, ‘선거·국민투표 지원’, ‘안전·재난 관련 정책 수립 및 총괄’ 등이 있지만 ‘치안’은 빠져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법에 ‘치안’ 관련 규정이 없는 만큼 행안부가 시행령을 통해 경찰 사무를 관할하는 것은 위헌·위법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1948년 정부조직법 제정 당시에 내무부(현 행안부)의 사무로 규정됐던 ‘치안’이 1990년 법 개정 때 삭제된 것도 주된 논거가 됐다. 경찰에 대한 정부의 입김을 제한하기 위해 과거 상위법에서 ‘치안’을 삭제했는데, 시행령을 통해 행안부 경찰국을 신설하게 되면 법 개정 취지에 반한다는 논리다. 이 시행령 역시 단 4일 동안 입법예고를 하는 등 속전속결로 추진했다.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왼쪽)이 지난 8월 2일 정부서울청사 내 경찰국 입구에서 직원 격려방문을 마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입법권 논란의 화룡점정은 야당의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에 대응한 정부의 ‘검수원복(검찰수사권 원상 복구)’ 추진이다. 검수원복 역시 대통령령인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개정을 통해 추진했는데, 앞선 인사정보관리단·경찰국 설치와는 다소 성격이 달랐다. 후자는 이들 조직 신설이 상위법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면, 검수원복의 경우는 시행령이 상위법의 취지와 정면 배치된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지난 4월 국회를 통과한 개정 검찰청법은 검사가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범죄를 기존의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에서 ‘부패·경제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범죄’로 제한했다. 정부는 해당 조문에 ‘~등’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부패·경제범죄는 예시일 뿐이라며 중요범죄의 범위를 시행령으로 확대했다. 기존에 공직자 범죄와 선거 범죄로 각각 분류된 직권남용죄, 매수죄 등을 부패범죄에 포함시키는 식이다.

지난 9월 10일 검찰수사권을 축소하는 법률과 수사권을 복원하는 시행령이 동시에 시행되면서 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직권남용죄로 수사를 받는 피해자가 ‘시행령이 위헌·위법하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가능성도 있다. 국회와 정부의 ‘강 대 강’ 대치로 법적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게 된 셈이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제한하고 장기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자는 것이 법 개정 취지인데, 정부 시행령은 입법 취지 불합치가 되는 것”이라며 “현존하는 법률이 1500개가 넘는데 이중 일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악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컨대 노동자와 시민들이 요구한 중대재해처벌법도 기업들이 보기에는 악법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설령 악법이라고 하더라도 법률 제·개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법률을 무력화하고 나서면 법치는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고 했다.

정권 바뀌는 5년마다 논란 반복

사실 시행령 통치 논란은 정부가 바뀌는 5년마다 반복되고 있다. 이번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 때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서 시행령을 개정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피해갔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특별법을 통해 꾸려진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시행령으로 위축시키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시행령 개정을 통해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기간 동안 3762건을, 박근혜 정부는 4년 2개월간 3667건을, 문재인 정부는 4602건의 시행령을 공포했다. 국회와 타협하고 협치를 통해 법·제도를 설계하기보다는 손쉬운 행정입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셈이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점차 타협의 여지가 없어지면서 행정입법 의존도가 높아진 측면이 있다. 대통령제의 원형인 미국도 정치지형이 ‘타협하기 어려운 적과의 싸움’이 되면서 의회를 우회하는 다양한 수단이 발전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보면 미국의 안 좋은 트렌드가 한발 빠르게 유행한 것이다. 미국보다 더 나쁜 건 미국은 민주주의에 맞는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맞는지를 두고 논쟁을 한다면 한국은 당파적 싸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4대강 사업 저지 범대책위원회 회원들이 2011년 4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친수구역특별법 시행령 통과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앞서 4대강 공사 희생자에 대한 묵념을 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논란에도 행정입법을 통제·견제할 장치는 부족한 상황이다. 행정입법은 크게 3가지 층위로 통제할 수 있다. 첫째가 입법예고 등을 통한 의견수렴, 법제처의 심사, 국무회의 의결 등으로 대표되는 행정부의 내부적 통제다. 하지만 법제처와 상의해 입법예고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실질적 통제를 기대하기 어렵다. 사법부가 행정입법의 위법성을 따지는 사법적 통제도 불완전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건부터가 까다롭다. 헌법이 정한 권리를 침해받은 당사자가 있어야 하고, 이 당사자가 국가기관을 상대로 권리구제에 나서야 한다. 설령 위법이 확인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 구제 대상도 당사자에 한정된다.

입법부의 통제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현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현행 국회법은 시행령 등이 법률 취지와 맞지 않을 경우 국회 본회의 의결을 거쳐 정부에 국회의 ‘개정의견’을 송부하도록 하고 있다. 강제력이 없어 정부가 개정의견을 수용하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다. 국회사무처 법제실은 매년 금융관계법·고용노동법 등 1~2개 분야를 정해 행정입법이 상위법의 취지·내용에 부합하는지 등을 분석한다. 국회사무처가 2017년부터 올해 1월까지 9개 분야를 살핀 결과 행정입법 지적사항은 모두 274건으로 집계됐다. 이중 96건은 법률로 정해야 마땅한 사안임에도 시행령으로 정해 법률 개정이 필요한 경우에 해당했고, 178건은 행정입법 자체의 개정이 필요한 경우에 해당했다. 국회의 행정입법 개정의견 178건 중 실제 개정이 이뤄진 경우는 20건에 불과했다.

행정입법 국회 통제 강화해야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의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단골손님’이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시행령에 대해 국회 상임위가 수정·변경을 요청할 경우 정부가 이를 처리해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의 검토결과보고서를 송부할 뿐인 현행 국회법보다는 나아간 내용이지만, 정부가 국회의 수정 요구에 따를 의무는 여전히 없다.

민주당만 행정입법을 견제하는 국회법 개정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 때는 국민의힘의 전신인 자유한국당 소속 김현아·백승주 의원 등이 관련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다. 당시 김현아 의원안은 “행정부가 국회의 시정요구에 대한 처리결과를 보고하지 않을 경우, 본회의 의결을 통해 행정명령의 효력을 상실시킬 수 있다”는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의 실질적 통제 방안까지 담았다. 사실 조응천 의원이 이번에 내놓은 개정안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여야 합의로 마련된 국회법 개정안과 다름없다. 당시 대통령은 야당과 합의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라 몰아세우며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했다.

야당일 때는 국회법 개정을 주장하다가 여당이 되면 침묵하는 여야의 역할교대, 대통령과 여당의 수직적 관계가 법 개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 김현태 창원대 명예교수는 “입법부는 행정부의 견제세력이어야 하는데 여당이 행정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다 보니까 (정부의) 발목을 잡겠다 싶은 부분은 법 제·개정 때 빼버리는 경향이 있다”며 “우리나라의 법률 자체가 너무 많은 부분을 행정입법으로 할 수 있도록 추상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문제가 발생하는 측면도 있다. 애초 입법부가 법률을 제정할 때 상세한 부분까지 접근하는 등 입법역량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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