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cm 신장으로 205cm 앞에서 더블클러치 시도했죠"

김종수 2022. 9. 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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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54)] '베이비 조던' 이항범

 

“저에게 농구선수란 무엇이냐고요?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후회스럽고 또 그러면서도 미소짓게 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같은 존재죠. 진작에 이별은 했지만 그 뿌리는 남아서 현재를 이루고 앞으로 미래까지 열매를 맺게할겁니다”


우리네 기억상자 속에는 이른바 첫사랑의 추억이 아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루지 못했기에 혹은 그렇게 하면 안됐는데…, 등 아쉬움, 후회, 훈훈함, 웃음 등 여러 가지 감정으로 당시를 담는다. 기억은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으나 재생 버튼을 누르면 가슴에서부터 상영된다. 잊어졌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 선명하게 감정을 지배하기 일쑤다.


이항범(42‧168cm) JBJ 바스켓볼 클럽 대표에게 2004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는 첫사랑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작은 신장으로 인해 ‘과연 지명이 될까?’라는 의구심이 가득했던 분위기 속에서 2라운드 7순위로 모비스에 지명됐다. 이후 이전 시즌 R.F. 바셋 ↔ 무스타파 호프 트레이드 당시 있었던 KCC와 모비스 간 지명권 맞교환 등으로 인해 KCC에 입단하게 된다. 이항범을 눈여겨본 신선우 감독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2라운드에 지명됐음에도 이항범에 관한 세간의 관심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전체 1순위 이정석(연세대), 임효성(성균관대)은 물론 양동근(한양대)보다도 훨씬 많은 시선을 받았다. 거기에는 이항범 특유의 화제성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졸 출신, 일반인 자격으로 드래프트 참가, KBL 최단신 선수, 배우 고 이병철의 차남 등 농구와 무관한 언론에서까지 흥미를 가질만한 요소가 가득했다.


“지명 당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쁨이 컸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키는 농구 선수를 하기에는 치명적이었잖아요. 일반인 중에서도 작다는 소리를 들은 신장인데 농구선수로서 프로무대에 입성하게 된 것인지라 제 자신에게도 너무 자랑스러웠죠. 당시 언론사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아버지께서도 볼에 뽀뽀를 해주시며 너무 즐거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될까 될까하면서도 포기하지않고 계속 짝사랑하다가 드디어 고백을 허락받은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동안 노력해온 여러 가지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죠”


그만큼 이항범의 지명은 인간승리에 가까웠다. 신장에서 오는 핸디캡은 치명적이다못해 선수로서 불가능하다는 혹평에 시달렸고 고교졸업후 일반병으로 군대까지 갔다가 돌아온 상태인지라 실전감각 등에서도 현저히 떨어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팬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고졸 출신 168cm 최단신 선수가 장신자들의 무대 KBL에서 생존할 수 있는가에 시선이 모아졌다.


“보통 첫사랑에 빠져있던 때는 어린 시절이잖아요. 경험은 부족한데 열정만 가득한…, 나중에 생각하면 후회할일 투성이지만 그때는 잘 모르죠. 당시의 제가 그랬어요. 원하는 농구선수가 됐다는 점에서는 너무 기뻤지만 주변의 과도한 관심이 견디기기 쉽지않더라고요. 앞길은 생각하지 못한 채 그 순간만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고말았죠”


결국 이항범은 프로 데뷔전도 치르지 못한 채 도망치듯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말았다. 다행히 이후 방황은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못다한 농구의 꿈을 지도자로서 펼치고 있다. JBJ 바스켓볼 클럽 대표, KBS스포츠예술과학원 교수 등 농구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히 활동중이다. 아쉬운 첫사랑의 아픔을 딛고 완숙한 사랑을 만들어가고있는 농구인 이항범의 ‘바스켓볼 러브스토리’속으로 함께 들어가보자.
 

 

“마이클 조던 영상을 보는 순간 그대로 푹 빠져버렸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JBJ 바스켓볼 클럽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서 지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엘리트, 일반부, 유소년 모두 포함입니다. 직접 가르치는 역할도 하지만 아무래도 대표로 있다보니까 실무 등 이런저런 일도 겸하고있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그 외 KBS스포츠예술과학원에서 실기교수로도 있습니다. 잠시 방황의 시간도 있었지만 제가 죽을 힘을 다해 배워온 농구를 다른 누군가를 성장시키는데 쓸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일상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선수 생활이 짧았잖아요.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또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보면 남들보다 일찍 지도자 생활에 눈을 뜬점도 있었어요. 여기에는 신앙의 힘도 컸습니다. 제가 힘들 때 힘이 되어줬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분명한 길을 알려주었죠. 주변에서는 제가 스킬트레이너 전문으로 오래갈 것이다고 예상한듯한데 솔직히 말하면 거기에 더해 다른 것도 추가하고 싶었어요. 다름아닌 유소년 양성이에요. 저같이 신체적으로 불리하고, 방황의 시절도 겪었던 이의 경험과 거기에서 얻은 이런저런 것들을 함께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엘리트도 좋지만 보다 더 많은이들이 농구를 재미있어하고 즐겼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저변확대가 되고 장기적으로 농구도 발전할 수 있는 길이고요. 또 제 성향상 아이들과 소통하고 즐기는게 제법 잘맞는 것 같기도해요.

Q.말 속에서 깊은 신앙이 느껴져요.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은 제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어머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신앙과 함께 했으니까요. 사실 JBJ라는 명칭도 그와 연관이 있어요. 첫글자 J는 지저스를 뜻하고요. BJ는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제가 선수 생활 할 때 팬클럽 이름이 ‘BJ(베이비 조던)’였어요. 그래서 로고를 보면 십자가를 지고있는 형상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해서 넣어봤죠. 저같은 경우 어린시절 비디오테이프 등을 통해 마이클 조던 영상을 보면서 농구를 접했고 그런 훌륭한 선수가 되고싶다는 꿈을 꾸게됐어요. 하지만 딱히 배울 수 있는 통로가 한정되어 있던지라 혼자 영상을 보고 따라하면서 독학을 하다시피했어요. 그때 느꼈던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만큼은 체계적으로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강한 편입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정말 우연이었어요. 아니 우연이 겹치고 또 그런 가운데 제 마음 속을 농구가 지배해버렸으니 필연 혹은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린 시절에는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장래에 농구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었고요. 그냥 어릴 때 집 근처에 농구 골대가 있었는데 농구동아리 형들이 수시로 게임을 즐기고는 했어요. 지금도 여전히 저에게는 높은 골대지만(웃음) 어릴 때는 더더욱 높아 보였죠. 그곳에 공을 던져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고 형들 뛰어다니는 것만 봐도 재미있었어요. 같이 뛸 생각도 입장도 안되었고 간혹 음료수 심부름이나하며 구경만 계속했죠. 그러다가 한 형이 저에게 마이클 조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줬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던이잖아요. 농구황제. 어린 꼬마 눈에 그 화려하고 엄청난 플레이가 얼마나 대단하게 보였겠습니까.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냥 농구에 관한 매력에 빠져버렸습니다. 농구공을 들고나가 혼자 막 드리블을 치고 빈 골대에 슛을 던져보고 그랬죠. 농구를 했다기보다는 조던 흉내를 냈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그때가 초등학교 4~5학년때였어요. 선수부 아이들처럼 멋있게 원핸드슛을 던지고 그런게 아니라 골대 근처에서 낑낑대면서 어떻게든 넣어보려고 기를 쓰고 그랬죠.(웃음)

 

 

Q.기초부터 제대로 배운 다른 또래들하고 스타일부터 차이가 있었을 듯 싶어요.
맞아요. 이후 엘리트농구도 시작하게 됐는데 다들 제가 유학파인줄 알았데요. 드리블부터 다른 또래들하고 달랐으니까요. 아무래도 조던이 좋아서 미국 선수들 영상을 보고 독학을 했던지라 생소하게 보였을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는 그런 플레이를 엘리트 쪽에서는 싫어했어요. 그렇게 드리블치고 그러면 겉 멋들었다는 얘기가 나오던 때니까요. 하지만 저는 겉멋이 든게 아니라 배운게 그것밖에 없었거든요. 지금에서야 물 만난 고기처럼 아이들에게 당시에 배우던 테크닉을 전수하고 있지만 그때는 선배들에게 ‘항범이는 너무 앞서가고 있다’는 얘기도 듣고그랬죠.

Q.엘리트 농구 쪽으로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요?
중학교 1학년 때인가 나이키에서 주최하는 길거리농구대회가 동부이천동에서 있었는데 거기를 나가게 됐어요. 그냥 농구가 좋아서 친구들하고 함께 출전했던거죠. 당시 아버지께서도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시고 고려대 박한 감독님 등 운동 쪽에 지인도 많으셨어요. 하지만 하필 제가 선택한 것이 농구인지라 선뜻 추천을 못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키가 너무 작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죠. 그래서 상대적으로 신장의 제한을 덜 받는 축구도 권하고 그러셨는데 저는 끝까지 농구를 고집했었습니다. 농구에 미쳐있던 때인데 다른 스포츠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죠. 아버지도 농구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판단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던지라 대회도 몰래 나가게 됐어요. 당시 경복고등학교 감독님께서 엘리트 선수들하고 함께 자원봉사같은 것을 나오셨어요. 그러다가 제 플레이를 보고 ‘선수를 한번 해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오셨어요. 일종의 스카웃 제의 같은 것이었죠.

Q.하지만 경복고로 진학을 하지않았습니다.
길거리농구대회에서의 인연으로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경복고등학교 농구부에 가서 합숙을 하면서 훈련을 함께 했어요. 일종의 엘리트 체험이었죠. 그때 지금 현 서울 삼성 감독인 (은)희석형도 알게 됐죠. 다들 아시겠지만 경복고는 삼선중하고 연관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경복고를 가기 위해 삼선중을 가려고 했는데 선수 숫자가 다 차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옆에 있던 홍대부중으로 방향을 틀었죠. 마침 아버지께서도 홍대부중 교장선생님을 알고 계셔서 거기서 엘리트 농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때의 결정으로 인해 홍대부고까지 가게된 것이고요.

 

 

“조던의 플레이 뿐 아니라 과감성까지 따라하고 싶었죠”

Q.주변에서 계속해서 작은 신장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듯 싶어요.

그럼요. 끊임없이 언급이 되었죠. 언급이 안될 수가 없는 키잖아요.(웃음)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편견이에요. 키가 큰 선수가 경기 등에 나가 실수를 하게 되면 말 그대로 실수인거에요.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를 했다고 여겨지게 되죠. 반면 제가 실수를 할 경우 ‘봐라. 역시 안되잖아’라고 한계에 대한 선을 바로 그어버려요. 편견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는 그들의 주장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물같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제가 실수하면 데미지가 훨씬 큰 지라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정말 지독하게 연습했어요. 팀훈련은 물론이거니와 개인 연습에도 많이 매달렸던 기억이 나요. 신장을 뛰어넘는 활약을 펼쳐도 본전인지라 현상 유지를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헛된 시간은 아니었어요. 이후 개인적인 발전은 물론 현재 아이들을 가르치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까요. 신장 등으로 고난의 시간이 많았던 만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Q.신인드래프트의 벽은 뚫었지만 결국 데뷔는 하지 못했어요. 선수로서 어느 정도만 활동했더라도 키 작은 선수들의 희망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럼요. 저도 후회하는 부분입니다. 신인드래프트서 지명받고 팀에 합류해 훈련을 받았을 당시 단신 유망주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이콘이 됐다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168cm 프로선수는 전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드문 케이스니까요. 그 자체가 매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죠. 그런 상황에서 6개월 정도 지나서 은퇴 선언을 했을 때는 실망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어요. 요약하자면 ‘희망도 줬지만 실망도 함께 안겨줬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돌이킬 수 없잖아요. 선수로서는 아쉽지만 지도자로서 그때의 경험을 녹여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더욱 신경쓸 수 밖에요. 선생님같이 작은 사람이 프로에서 지명까지 받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며 학창시절의 노력과 열정을 얘기해주고 더불어, 이후 선수 생활을 오래 가져가지 못한 데는 이러이러한 이유가 있었다는 부분도 함께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Q.좋은 부분과 함께 치부가 될 수 있는 부분도 함께 오픈하고 있네요.
맞습니다. 저는 지도자입니다. 예전에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어서 저에게 마이너스가 될만한 부분들은 애써 꺼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이들을 가르키면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어요. 모든 것을 꺼내놓고 진심으로 소통해야 저의 마음을 더 잘 받아들일 것 아니에요. 거기서 제 자존심 살린답시고 좋았던 이야기만 하는 것은 진실한 태도가 아니죠.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Q.플레이스타일이 궁금합니다. 돌파형이었나요 아니면 패스에 능하거나 슈터?
앞서 언급했듯이 저는 유학파냐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에서야 많이 쓰여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잘 쓰지 않던 스킬을 많이 구사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공격적인 색깔을 유지하면서 평균 20득점이 훌쩍 넘는 고득점을 올리는 유형이었죠. 남들이 보면 ‘저 키로?’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얼핏 매치가 안될지 모르겠지만 저 스스로는 좀 더 파워 있고 적극적인 공격력을 내세웠습니다. 보통 키가 작은 선수들은 패싱게임 위주로 플레이를 하거나 외곽에서 슛을 많이 던질 수밖에 없거든요. 저는 조던을 보면서 농구에 빠졌던 케이스인지라 과감하게 림어택을 하는 플레이가 당연한 줄 알았어요. 몸에 익숙했고요. 상대가 크던 작던 신경쓰지 않고 림이 보이면 돌진했습니다. 심지어 (김)주성이 형이나 외국인선수가 앞에 있어도 개의치 않고 떠서 장기인 더블클러치를 구사했습니다.

Q.예? 김주성을 달고 떴다고요? 학창시절부터 최고로 꼽혔던 빅맨 김주성 맞죠?
맞아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빈틈이 보이고 그냥 들이댔습니다. 키가 작다고 키 큰 선수를 두려워하는 성격은 아니었거든요. 이후 주성이 형도 ‘설마 항범이가 나를 앞에 두고?’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주변에서 ‘항범이는 키만 작을 뿐이지 외국인가드처럼 플레이한다’고 말하고는 했어요. 조던의 플레이뿐 아니라 과감성까지도 닮고 싶었어요. 백넘버도 23번이었거든요.

Q.키가 작은 대신 질풍같이 빨랐던 것일까요?
당시는 단신가드는 무조건 빨라야 된다는 인식이 강했던 시절이에요. 어찌보면 키 작은 선수가 가져갈 수 있는 몇 안되는 강점 중 하나니까 당연스레 그래야 됐던 것 같기도 해요. 그냥 경기 내내 빠르고 또 빠르게 코트를 마구 달리는 거죠. 하지만 저는 조금 달랐어요. 처음에 보고 배웠던게 NBA식 플레이였던지라 최근 들어서 활성화된 템포바스켓을 일찌감치 장착했던 듯 싶어요. 저도 모르게 특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던 것이죠, 빠를 때는 엄청 빠르게 가다가도 상황에 따라서는 속도를 확 죽여버리는 등 그 차이를 많이 가져가면서 움직였어요. 작은 선수가 빠른 것은 분명 장점이에요. 하지만 거기에 상대가 익숙해지다 보면 어렵기는 해도 조금씩 답이 나올 수가 있어요. 거기에 스피드로는 따돌려도 높이에서의 어려움은 분명 따를 수밖에 없고요. (김)승현이 형이 했던 말이 있어요. 형이 대학교 시절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그때 연습경기를 제법 많이 치렀는데 그때 저의 플레이에 대해 “항범이는 막기가 정말 힘들다. 느린 것 같은데 빠르고, 빠른 것 같은데 느리게 움직이는 등 종잡을 수가 없는 선수였다”고 하더라고요. 승현이형같이 대단한 선수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 영광이었죠. 어쨌든 저의 리듬감 자체가 다른 가드들과는 달라서 바로 그 점 때문에 수비수들이 더 힘들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보통의 선수들에게는 평범한 플레이 조차 저는 달라야만 했습니다”

Q.림어택형 공격형 가드였다고 보면 맞을까요?

아뇨. 그것 하나로는 저같은 단신가드가 살아남을 수 없죠. 키 작은 입장에서 이것저것 다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했어요. 3점슛도 경기당 2~3개씩은 메이드 시키고 다양한 방식으로 득점을 할 수 있는 선수가 되려고 했죠. 키는 작아도 골대를 한 손으로 잡고 매달리는게 가능해질정도로 점프 연습도 많이 했습니다. 타고난 신체조건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외에는 두루두루 잘하고 싶었어요. 사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긴장도 되고 두려움이 엄습할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다시 이미지 트레이닝 등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평소에 연습한데로 제 기량이 나온다면 설사 마이클 조던이 온다해도 해볼만하다고요.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저만의 방식이었죠. 그렇게 멘탈 무장을 하고 코트에 들어서면 키 큰 선수들도 동등한 상대로 느껴지더라고요.


Q.수비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없을 리가 없죠. 키가 작아서 불리한 점은 정말 많겠지만 좀 더 깊숙이 따지고 들면 수비에서의 어려움이 가장 큽니다. 미스매치라는 말이 왜 나오겠어요. 대부분은 신장 차이가 날 때 그런 표현을 하잖아요. 보통 신장이 비슷한 선수끼리는 수비수가 공격자를 비슷하게 따라만 다녀도 어느 정도 수비가 되요. 하지만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저같은 경우는 그렇게 하다가는 무조건 지는 게임이에요. 그래서 수비에서도 많은 변칙을 시도했습니다. 일단 상대가 편하게 드리블을 치기 시작하면 저는 지는거에요. 최대한 상대가 볼을 어렵게 잡고 드리블의 시작부터 까다로운 상황을 만드는데 집중했죠. 바싹 붙어서 귀찮게 하고 계속해서 스틸을 시도하는 한편 선수들간 패스 타이밍, 림에 맞고 떨어지는 등의 상황을 끊임없이 예측해가면서 수비에 임했습니다. 아무리 공격에서 역할을 해줘도 수비에서 자동문이 되면 가치가 뚝 떨어지게 되는 것이잖아요.  

 

 

Q.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조던이지만 정작 플레이 스타일은 앨런 아이버슨과 더 닮은 것 같아요.
어어, 맞아요. 그런 얘기를 제법 들었어요. 제가 조던과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앨런 아이버슨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제가 봐도 플레이 스타일은 아이버슨과 더 닮은 듯 싶어요. 언젠가 방송에서도 하하형이 ‘항범이는 아이버슨과 닮았다’는 말도 해줬고요. 조던 보면 포지션대비 신체조건도 좋고 플레이 자체도 간결하잖아요. 아이버슨은 아무래도 신체적인 핸디캡도 있어서 좀 더 잔기술이 많이 들어가고요. 마음은 조던이지만 몸은 아이버슨이라고 해야 될까요.(웃음)

“단체생활에 적응못하는 개인적인 성향의 소유자요?”

Q.성균관대나 KCC 시절의 사례 등에 비쳐서 단체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게으르다는 의견도 많았어요

많았죠. 일단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자초한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성균관대 입학이 확정됐을 무렵이나 KCC 시절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적지 않으니까요. 일단 성균관대부터 말씀드리자면 셨습니다. 저를 뜯어고치고 싶어하셨어요. 하지만 이전까지 그렇게 농구를 시작하고 배워온 제 입장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죠. 어느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교만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이렇게는 안되겠다. 차라리 군대를 빨리 갔다와서 바로 프로에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Q.아주 특별한 케이스 외에는 무조건 대학을 나와야 하던 시절 아니었나요? 자신감이 대단했던 듯 싶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성대에서 제 플레이를 펼치기가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면서 더더욱 그랬어요. 자신감과 더불어 뭔가 심적으로 명분이 필요했지않나 싶기도 하고요. 더불어 이전 프로 지도자들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부분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농구를 배워가면서 ‘너는 키가 작아서 한계가 있다. 때문에 대학진학도 어려울 것이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면서 여러 대학교에서 스카웃제의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당당히 특정 학교를 선택해서 갔는데 스스로 족쇄가 채워진 꼴이 되어버린지라 심리적으로 힘들었죠. 결국 수능도 보지 않았고 성대 입학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Q.일단 성균관대를 가지 않은 이유는 다른데에 있었군요.
맞습니다. 흔히들 저를 이야기할 때 단체생활에 약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생각해볼 점은 저는 군대를 현역으로 갔다 왔다는 부분입니다. 군 생활도 나름 열심히 잘했습니다. 단체생활에 문제가 있는 성향이었다면 평탄하게 국방의 의무를 마치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사실 성대를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저 감독과 항범이는 맞지 않을텐데…’라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어요. 저는 그걸 무시하고 간거고요. 어쨌거나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거기에 맞추는게 맞았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저에게 맞지 않는 환경에 대한 변화욕이 강했고 그렇게 다른 방향을 갈구했던 것 같아요.

Q.그럼 KCC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을까요?
아니요. KCC에서는 그런부분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외려 저를 필요로 해서 선택해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죠. 연습생도 감지덕지한 상황에서 직접 지명을 받았으니까요. 당장 신선우 감독님만 하셔도 저의 가능성은 높이 인정해주시던 분이셨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기아, 현대 등 프로팀들과 연습경기도 종종 했어요. 그때 신선우 감독님께서 저에게 ‘나중에 현대에서 보자’고 말씀해주셨는데 순간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대학도 입학 안한 고등학생이 받을 수 있는 칭찬 중에서는 최고 아닐까요. 그 뒤에 더욱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이야기들 때문에 군대 갔다 와서 프로로 바로 가자는 안이한 생각도 품었던 듯 싶어요.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섰던 어린 나이였던지라 저한테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고 생각하는 상황이었던 거죠.

 

 

Q.그렇게 고마웠던 신선우 감독의 KCC에 들어왔는데 왜?
그러게요. 당시 저는 과감하고 나이스한 선택도 많이 했지만 삐끗한 판단 미스도 적지 않았었네요. 일단 군대로 인해 2년 2개월의 공백기가 있었잖아요. 한창 운동해야 될 때 운동도 못했고 여러모로 기량에 영향이 있었을거에요. 물론 현역병으로 갔다고 무조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볼은 만지지 못했지만 틈만 나면 팔굽혀펴기와 역기 등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몸이 좋아졌고 실전 감각과 별개로 드래프트 당시 장점으로 평가받았어요. 거기에 군 복무를 해결한 점도 플러스였고요. 신선우 감독님께서도 그러한 부분을 두루두루 감안하시고 저를 선택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아쉬운 것 투성이지만 당시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른바 부담감이었던 것 같아요.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하고…, 인생에서 후회하는 순간입니다”

Q.‘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그런 부담감요?

아뇨. 그런 부담감도 있었지만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경기력과는 별개로 쏟아지는 과도한 스포트라이트였습니다. 2004 신인드래프트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선수가 저입니다. 전체 1순위 양동근보다도 더 많은 시선을 받았죠.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2라운드 지명자였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여기에는 기량이나 커리어 외에 다른 부분들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68cm의 작은키, 아버지가 잘 알려진 배우라는 것 등이 이유였었죠.

Q.확실히 부담스럽기는 했을 듯 싶어요.
사실 제가 엄청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팀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을거에요. 팀 내에서 실시하는 훈련도 잘 받고 그랬거든요. 하지만 쏟아지는 관심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기량을 선보일 때가 다가올수록 절벽 위에 선 사람 마냥 두려움이 엄습해오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말도 안되는 결정을 혼자 내려버린 것이죠. 이것저것 이유를 대자면 만들어서라도 댈 수 있겠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냥 그 순간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닥칠 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당장만 넘기자는 단순하고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 이후 고등학교 선배인 (이)상민이형 등에게도 연락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상황을 벗어나는 데만 급급했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상의하고 조언도 구할 수 있었는데 혼자 판단하고 결정했다는 점은 인생에서 참 후회스러운 일이에요. 그런 일을 겪었기에 아이들에게는 ’혼자서 결정하지 말고 함께 상의하고 다른 이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자‘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처럼 후회하면 안되니까요.

Q.후회하는 감정이 들기까지는 얼마나 걸렸나요?
한 3개월이 지난 후부터 현실인지가 되더라고요. 그때는 뭐에 씌인 것처럼 막무가내로 도망치다시피 해서 나왔는데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오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하는 후회부터 온갖 감정이 다 들었습니다. 한때는 인생의 목표였던 부분을 이뤘음에도 스스로 걷어차 버린지라 사람들을 만나기도 두려워져서 대인기피증까지 생겨났죠. 거의 1년 동안은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고요. 부모님 등 가까운 사람들은 물론 저에게 기회를 줬던 KCC에도 큰 잘못을 한 셈인지라 죄인이 된듯한 심정을 떨쳐내기 어려웠습니다. 마냥 놀 수 만은 없어서 이후 2~3년정도는 얼굴 가리고 막노동이나 택배일 등을 하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죠. 대리운전도 하려고 했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얼굴이 알려져서 그쪽에서 알아보는 바람에 부끄러워서 나와버리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당시에 받았던 이런저런 스포트라이트가 행복한 일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죠. 당시 ㅇㅇ우유나 ㅇㅇ큰사발 등에서 CF제의까지 들어왔을 정도로 너무 많은 기회가 가득했거든요.

Q.그래도 결국 아이들을 지도하는 길을 통해 농구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게요. 잠시 방황했지만 그것만큼은 잘한 선택같아요. 제가 키가 작다는 것은 아픔도 있었지만 기회로도 작용했습니다. 솔직히 그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작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것들이었잖아요. 여전히 농구가 좋아서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좋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상태에서 얼굴을 들이민다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언제까지 그렇게 살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상당 부분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용기도 냈죠. 선수로서의 길은 스스로 버렸지만 그간 해왔던 노력의 결과물을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동기들과 비교했을 때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전화위복이라는 표현은 그렇지만 악조건 속에서 그래도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제 인생의 롤모델이자 가장 편한 친구였습니다”

Q.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농구하는 것을 반대하셨다고 했잖아요. 이후에는 어땠나요?

많이 응원해주셨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제가 무엇을 하고 싶다면 늘 지지해주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 분이셨어요. 다만 농구같은 경우 워낙 신장의 영향을 받으니까 이래저래 걱정이 많으셨던 거죠. 처음에 농구 시작하고 나서 아버지에게 1년 정도는 경기장에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어요. 알았다고는 하셨지만 내심 서운한 부분도 크셨을거에요. 아들이 경기 뛰는 것을 보고 싶으셨을 것 아니에요. 저로서는 뭔가 어리버리한 모습보다는 잘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다행히 6개월 정도 지나면서 개인상도 타고 그때부터 저도 자신감이 생겨서 아버지가 농구장을 찾는 것을 말리지 않게 됐어요. 이후 아버지에게 ‘배우 이병철이 있는데 그 아들이 농구를 잘하더라는 소리보다 농구를 잘하는 친구가 있는데 알고보니 배우 이병철의 아들이었더라’는 얘기를 듣고 싶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아버지께서도 흡족해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Q.아들이 농구를 그만두었을 때 상심이 크셨을 듯 싶어요.
크셨죠. 하지만 티를 내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께서도 농구를 할 때 거의 관여를 안하셨어요. 제 판단과 열정을 많이 믿어주셨던거죠. 농구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딱 한마디 하셨어요. ‘후회없겠어?’ 그리고는 ‘너가 해온 인생이니까 잘 알아서 판단하면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물론 속으로는 오죽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사방에서 온갖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데 부모님까지 나서서 질책하면 아들이 너무 힘들 것이다고 판단하셨던 거죠. 나중에 지인들에게 이야기 들어보니 저 프로 갔을 때 정말 뿌듯해하고 여기저기 자랑도 많이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너무너무 죄송하죠.

Q.돌아가신 후에도 SNS 등에서 회상하는 등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그렇죠.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거에요.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분들이셨죠. 돌아가시고 나니까 더더욱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져요. 항상 자식의 의견을 존중해주시고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주셨어요. 어머니는 병상에 있어서 함께 돌아다니지 못했지만 다행히 아버지하고는 마지막에 시간을 좀 보냈습니다. 선수로서 성공한 모습은 못 보여 드렸지만 지도자로서 잘 하고 있다는 것은 꼭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저기 행사나 경기 갈 때 모시고 다니고 그랬어요. 여전히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후회가 더 컸을 것 같아요.

Q.헤어스타일은 탈모 때문에 그런것인가요?
하하핫…, 아닙니다. 저 머리숱 많습니다. 헤어스타일하고 탈모는 전혀 무관해요. 학창시절부터 조던을 동경했다고 했잖아요. 조던 보면 민머리잖아요. 그것마저도 따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학교 다니면서 완전 삭발은 어렵잖아요. 자칫 반항한다는 오해를 살수도 있고요. 그러다가 성대에 갔을 때 선배들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전체 삭발을 한적이 있어요. 이때다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삭발을 하게 됐고 계속해서 해당 헤어스타일을 고수했습니다. 제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고요. 사랑하는 아버지 이병철씨께서 제 생일 때마다 바리깡을 선물해 주셨죠.(웃음) 미용실 안간지도 몇 십년 됐습니다. 머리 감을 때나 샤워할 때 정말 편합니다.

Q.생뚱맞지만 싸움을 잘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아이쿠, 뭐 못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막 그렇게 잘한다고 하기도 그래요. 농구 할 때도 몸싸움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고요. 군대시절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몸을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근육도 있는 상태에서 머리까지 삭발이고 하다 보니까 강하게 보는 분들도 있으시더라고요. 특히 제가 농구선수인줄 모르는 분들은 투기종목 종사자로 보기도 했어요. 외형상으로 볼 때는 키가 작으니까 농구선수라고 하면 안믿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앉아서 설득하기도 그렇고요. 그래서 ‘운동선수세요? 무슨 운동하세요?’라고 물어보면 그냥 격투기선수라고 한적도 있어요. 그럼 사람들이 ‘데니스 강 닮았다’면서 바로 바로 수긍했던 기억도 납니다.

​Q.마지막으로 농구인 이항범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릴께요.
지금도 저를 기억하고 응원해주시는 분들께는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때 아쉬움도 안겨드렸지만 지도자로서 열심히 소임을 다하며 당시의 그 일이 전혀 가치 없는 과정이 아니었음을 살아가면서 증명해보고자 합니다. 열심히 하는 지도자로서 좋은 새싹들을 길러내는 일로 팬분들께 보답하고 싶습니다. 즐거운 농구, 함께 농구로 언제나 옆에서 같이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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