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론스타 사태'가 남긴 과제들
엘리엇·메이슨 등 다른 국제중재도 6건 남아
[주간경향] 지난 8월 31일 한국 정부와 론스타 간 투자자-국가 중재절차(ISDS) 사건 선고가 내려졌다. 2012년 중재절차가 시작된 뒤 10년 만이다.
중재판정부는 한국 금융당국이 2011 ~2012년 외환은행 매각 가격이 인하될 때까지 론스타가 하나금융지주로 외환은행 지분을 파는 걸 지연해 론스타가 4억3300만달러(약 5600억원)의 손해를 입었다고 봤다. 다만 론스타도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손해액 중 절반(약 2800억원)을 물어내라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보도자료에서 이번 선고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론스타 측 청구액 약 46억8000만달러(약 6조1000억원) 중 2억1650만달러(약 2800억원)에 대해 론스타 측이 승소하고, 나머지 44억6000만달러(약 5조8000억원)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가 승소했다. 정부는 청구금액 대비 95.4% 승소하고, 4.6% 일부 패소한 것이다.”
법무부 설명대로 한국 정부는 ‘선방’한 것일까. 보도자료 중 ‘팩트’와 다른 내용은 없다. 하지만 론스타가 조세·손해액 등의 쟁점에서 손해액을 과도하게 부풀려 청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청구액은 금융 쟁점 중 약 5600억원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오랫동안 론스타 문제를 추적해온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4.6% 선방’이 아니라 ‘50% 패소’”라고 평가했다.
론스타가 2003년 외환은행을 인수하면서 시작된 론스타와 한국 정부 간 악연은 이번 선고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이번 판정에 대한 취소신청을 진행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취소신청을 하면 결론이 나올 때까지 최소 1년 이상이 걸린다. 아울러 한국 정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6건의 다른 국제중재에도 대응해야 한다. 유럽을 중심으로 ISDS 폐지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한국 정부가 ISDS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정할지도 남아 있는 과제다.
취소신청, 과연 인용될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8월 31일 론스타 ISDS 사건 판정 선고 브리핑에서 “이번 판정을 수용하기 어렵다”며 취소신청 의사를 밝혔다. “대한민국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 단 한푼도 유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각오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
이번 사건 중재기관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협약은 중재판정을 최종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상소 절차가 허용되지 않으며 단심제가 원칙이라는 취지다. 다만 협약이 열거한 사유에 해당할 경우 중재 당사자는 취소신청을 할 수 있다. 취소 사유는 중재판정부가 적절히 구성되지 않은 경우, 중재판정부가 명백히 권한을 유월(逾越·한도를 넘음)한 경우, 중재판정부의 중재인에게 부패행위가 있는 경우, 본질적인 절차규칙의 중대한 위반이 있는 경우, 중재판정문에 판정 이유를 명시하지 않은 경우 등 5가지로 극히 제한적이다. 사실관계 혹은 법률문제의 착오 등에 관한 판단은 취소 사유가 아니다.
한국 정부가 중재판정 뒤 120일 이내에 ICSID 사무총장에게 취소신청을 하면 별도의 취소위원회가 구성된다. 오현석 계명대 경제통상학부 조교수가 지난 6월 서강법률논총에 게재한 논문 ‘ICSID 취소 결정의 최근 동향 및 사례 분석’을 보면, 취소위원회는 중재판정을 취소하는 권한만을 가지고 있을 뿐 중재판정을 변경하거나 자기 자신의 결정으로 대체할 수 없다. 취소위원회가 중재판정의 일부 혹은 전부를 취소할 경우 이 결정으로 불리해진 당사자는 2차 중재신청을 할 수 있다. 다만 해당 당사자가 인용된 취소 사유를 살펴보고 재신청의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면 2차 중재 없이 사건은 마무리된다.
법무부는 구체적인 취소신청 사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중재 전략이 미리 노출돼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중재업계에선 중재판정부가 2019년 론스타와 하나금융 간 국제상공회의소(ICC) 상사중재 판정문을 증거 중 하나로 삼은 것을 한국 정부가 취소 사유 중 하나로 제시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판정문에는 “중재판정부는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볼 때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과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외환은행 매각 가격에 대해 명백하게 논의했고, 하나금융은 금융위의 (외환은행 인수) 승인을 받는 대가로 가격을 인하하도록 금융위로부터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는 대목이 포함돼 있다. ICC 상사중재 사건 당사자가 아닌 정부는 해당 사건에서 의견을 내거나 유리한 증거를 제출할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도 ICSID 중재판정부가 ICC 상사중재 판정문을 판단 근거로 삼은 것은 절차규칙의 중대한 위반이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간의 사례를 살펴보면 취소신청은 급증한 데 반해 취소위원회의 중재판정 취소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ICSID의 경우 현재까지 중재판정 전부가 취소된 사건은 6건이며, 일부라도 취소된 중재판정은 13건이다. 2020년 말 기준 취소신청에 대한 결정이 내려진 ICSID 중재판정이 총 88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취소신청 인용률은 21.6%다. 한국 정부가 2018년 이란 다야니 가문과의 ISDS에서 패소한 뒤 취소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전례도 있다.
시민사회에선 판정이 취소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법무부가 공개한 판정요지 문서를 보면 판정 무효 사유는 없다”고 말했다. “판정 무효 주장은 착시를 일으킨다. 중재판정대로라면 하나금융은 금융당국의 ‘불법’ 개입으로 애초 계약보다 수천억원 인하된 가격으로 외환은행을 인수했고, 인하된 금액 절반을 세금으로 물어주게 됐다. 한동훈 장관의 계획에 따라 판정 무효 신청을 하면 론스타 주식 매각에 ‘불법’ 관여한 금융관료의 책임을 규명하지 못하게 된다.”
한동훈 장관은 한국 정부 책임이 없다고 본 소수의견도 취소신청 근거로 언급했다. 하지만 소수의견은 한국 정부가 임명한 중재인이 낸 것이다. 중재판정부 3인 중 의장중재인을 제외한 2인은 중재 당사자들이 각각 임명한다. 중재인이 자신을 임명한 당사자의 입장을 반영한 의견을 무조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소수의견이 한국 측 중재인의 견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와 국회·시민사회 간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려면 중재판정문 전체를 공개해야 한다. 법무부는 지난 9월 6일 20쪽가량의 판정 요지서를 공개했지만, 아직 400쪽가량의 판정문 전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법무부는 비밀유지약정 때문에 양측 동의가 없을 경우 대외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다만 법무부도 신속히 판정문을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론스타 측도 판정문 공개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라 이르면 9월 말 판정문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기후행동 걸림돌 ‘ISDS’
기획재정부는 2011년 ‘ISDS,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입니다’라는 팸플릿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 조치가 정당하고 미국 투자자에게 비차별적인 경우에는 ISDS 피소 가능성은 사실상 없습니다. 피소 가능성 0%.” 기재부 설명과 달리 한국 정부는 현재까지 모두 10건의 국제중재에 휘말렸다. 론스타를 포함해 4건은 마무리가 됐고, 나머지 6건은 아직도 중재절차가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인 사건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메이슨이 2018년 제기한 ISDS다. 삼성물산의 주주였던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약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이슨 역시 같은 이유로 약 2억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엘리엇·메이슨이 청구한 금액 합계는 1조원을 웃돈다.
앞으로 한국 정부가 대응해야 할 ISDS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법무부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현재 6건의 중재의향서를 받았다. 외국인 투자자는 중재에 앞서 상대국 정부에 중재의향서를 보내는 절차를 밟는다. 중재 시작 전 양측 간 합의 유도를 위한 차원이다. 6건 중 합의로 종료된 ISDS(말레이시아 버자야 그룹)를 제외한 나머지 사건은 향후 공식 중재절차로 이어질 수 있다.
판정의 일관성 부족, 정부의 정당한 권한 행사 제약, 과도한 중재 비용 등 ISDS의 문제점이 갈수록 뚜렷해지자 국제사회는 ISDS 개혁 혹은 폐지를 위한 논의를 벌이고 있다. 특히 최근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 관심사는 ‘ISDS가 기후위기 대응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제연합무역개발협의회(UNCTAD)는 올해 9월 발표한 이슈 보고서 ‘ISDS 사례와 기후행동’에서 “ISDS가 기후위기 대응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쓰일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며 “ISDS 위험성을 완화하고 각국 정부가 기후행동을 할 수 있는 정책 재량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투자협정을 즉각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짚었다.
실제로 2030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키로 한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해 처음으로 국제중재에 휘말렸다. 독일의 에너지 기업 RWE는 네덜란드의 정책이 석탄화력발전사업자 손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아 에너지헌장조약 위반이라며 ISDS를 제기했다. 에너지헌장조약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 전 소비에트연방 국가, 일부 중동 국가, 일본 등 약 50개국이 참여하고 있고 한국은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 중이다.
유럽연합(EU)과 영국은 정부의 친환경 전환 정책 재량 확보를 위해 지난 6월 에너지헌장조약 개정안을 발표했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EU 회원국 간 ISDS 규정 적용 배제, 향후 10년간 화석연료 투자보호의 단계적 폐지 등이다. 회원국들이 오는 11월 몽골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개정안을 통과시킬 경우 국제사회의 ISDS 개혁 흐름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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