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한화 이글스 팬으로 산다는 것

박돈규 문화부 차장 2022. 9.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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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고 실망과 조롱을 견디는 일이다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꼴찌’야 너를 응원하며 인생을 배운다
한화 이글스 김인환은 육성선수 출신이지만 주전 1루수 겸 거포로 성장했다 /스포츠조선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팬으로 산다는 것은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다. 수확의 계절에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다는 뜻이다. KBO리그 소속 10팀 중 5팀이 즐기는 ‘가을 야구’에 초대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고춧가루 부대’ 소리나 듣는다는 뜻이다. 라커룸에서 짐을 뺄 준비를 하고 조명탑의 불을 일찍 꺼야 한다는 뜻이다.

43승 2무 85패. 19일 현재 한화 이글스의 성적표다. 승률은 3할 3푼 6리다. 다시 말하는데 타율이 아니라 승률이다. 3연전 중 두 경기에서 울고 한 경기에서 겨우 웃는다는 뜻이다. 1승 2패를 ‘루징 시리즈(losing series)’라 한다. 이글스는 시즌 내내 루징, 루징, 루징 행진곡을 불러온 셈이다. 그럼 패배에 둔감해질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매번 아프다. 화가 난다.

승률 6할 4푼 6리인 SSG 랜더스 팬들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2009년부터 2021년까지 꼴찌만 7번.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2018년을 빼면 이글스는 줄곧 하류 인생이었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데 너무 일관성 있게 바닥을 기었다. 오죽하면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도 울고 떠났을까. 리빌딩(육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화 이글스 팬으로 산다는 것은 모욕과 냉대를 감내한다는 뜻이다. 나머지 9팀은 우리를 쉽게 잡을 수 있는 사냥감으로 여긴다. “치킨 먹고 몸보신하자”는 조롱이 후렴구처럼 들려온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글스(독수리)는 어쩌다 날개가 있어도 날 수 없는 닭으로 전락했을까.

어디 가서 이글스 팬이라고 하면 “아니, 어쩌다 그렇게 되었나요?”라는 돌직구가 날아온다. 질문하는 사람의 속마음은 셋 중 하나다. 가엾어라, 고소하군, 또는 흥미롭네. 스윙도 안 하고 삼진을 당할 순 없어 이렇게 응수한다. 충청도에 고향이 있어 어릴 적부터 홈팀이었다고. 1999년 10월에는 우승의 기쁨을 안겨준 애인이었다고. 성적이 부진하다고 늙은 애인을 버리고 갈아탈 수는 없지 않느냐고.

KBO에서 한화는 LG, 롯데, 기아 못지않게 팬이 두껍다. 참담한 연패 행진 중에도 응원 열기는 식지 않는다. 천만 영화 ‘신과 함께’를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딸들에게 이글스 DNA를 상속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물려준 가장 훌륭한 자산이다. ‘인내’와 ‘분노 조절’ ‘대가 없는 사랑’. 이런 건 딸들에게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실망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이글스 팬은 참고 화를 삭인다. 애정을 거두지 않는다. 그래서 ‘보살 팬’이다. 모욕과 냉대와 조롱은 우리에게 밥이고 반찬이고 후식이다. 꼴찌? 무섭지 않다. 주식시장에는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지만 KBO에서 10등은 뒤에 아무도 없으니까. 내년에는 포스트시즌 진출 말고 9등을 목표로 잡자. ‘고작 9등’이 아니라 ‘무려 9등’이다.

바둑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미생(未生)’이라 한다. 미생으로 출발해 완생을 꿈꾸는 건 사람도 매한가지다.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야구판 미생’이 득시글할 때 좋은 성적이 나온다. 올해는 김인환처럼 패잔병이나 낙오자 취급을 받던 육성 선수가 좌절하지 않고 노력해 주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응원을 하며 인생을 배우는 순간이다.

한화 이글스 팬으로 산다는 것은 화창한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다는 뜻이다. 이제 올라갈 일만, 나아질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올해는 졌지만 내년에는 이길 수 있다. 실패할 각오로 몸을 던지고 투쟁하는 이글스를 응원할 것이다. 큰 점수 차이로 지고 있어도 8회면 어김없이 외칠 것이다. “최·강·한·화”를, “나는 행복합니다”를.

한화 팬이 대전 구장에서 응원하는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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