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정삼품 벼슬 받은 천년 은행나무
큰비와 태풍이 남긴 상처가 깊은 탓에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을 재우치게 된다. 사람의 성마름과 다르게 나무들은 천천히 가을을 채비한다. 단풍이야 아직 이르지만, 잎 위의 짙은 초록은 서서히 힘을 내려놓는 게 눈에 들어오는 즈음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고 노란 단풍이 짙어지며 가을로 화려해지리라.
노란 단풍으로 아름다운 은행나무 가운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는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다. 무엇보다 규모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몇 그루의 은행나무 가운데 한 그루다. 높이가 무려 42m에 이르고, 가슴 높이 줄기 둘레는 14m나 된다. 평균적인 아파트 14층 높이와 어른 8~10명이 둘러서야 겨우 나무 둘레에서 손을 맞잡을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벼슬을 얻은 나무이기도 하다. 세조로부터 정이품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충북 보은 속리의 정이품송보다 이른 세종 대에 ‘당상관’이라는 벼슬을 받은 나무다. 나무를 처음 찾아본 태종이 나무의 장대한 위용을 극찬했고,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선대 임금의 예찬을 받들어 나무에 특별한 벼슬을 내린 것이다.
나무에 얽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도 여러 가지다. 신라 때에 의상 대사가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신라가 멸망한 뒤 망국의 한을 안고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 태자가 심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나무의 나이는 천년을 훌쩍 넘었다는 이야기다.
천년을 넘기고서도 여전히 생식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도 놀랍다. 이 나무 한 그루에서 해마다 두 가마 정도의 은행을 갈무리한다고 한다. 열두 가마 분량의 은행을 맺던 한창 때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양이지만, 모질게 이어온 생명의 신비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우리의 은행나무가 보여줄 풍요로운 결실을 바라보며 여름이 남긴 크고 작은 상처들을 하루빨리 치유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가을 초입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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