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스토킹 없는 세상은

이은정 기자 2022. 9. 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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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역무원 전 동료에 피살, 처벌법 시행에도 범죄 늘어
'반의사불벌 조항' 등 맹점..국회 뒷북 개정 추진 한심, 강력범죄라는 인식 가져야

지난 14일 서울 신당역 여성 역무원 피습 사건 소식을 들었을 땐 여자 화장실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려다 일어난 범행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사건을 파헤치니 스토킹 살인이었다. 20대의 꿈 많은 피해자는 자신이 근무하던 공간에서 전 동료 전주환에게 살해됐다. 전 씨는 여자 화장실을 순찰하러 들어가던 피해자를 따라 들어가 미리 준비한 과도로 찔러 살해했다. 그는 일회용 위생모를 쓰고 피해자를 약 70분간 기다리는 등 범행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지난해 3월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도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 게임을 즐기던 김태현이 온라인 게임에서 알게 된 피해자가 연락을 끊고 만나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아파트에 침입해 세 모녀를 끔찍하게 살해한 것이다. 당시 온 국민이 큰 충격에 빠졌고 22년간 묵혀뒀던 스토킹 처벌법은 국회에서 통과돼 지난해 10월부터 시행됐다. 법 시행 전에는 10만 원 벌금형에 그쳤다. 정치권은 1999년 처음 발의된 관련법이 국회에 통과한 건 처음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반의사불벌 조항 등이 포함돼 실효성이 없다는 여성계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았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스토킹 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관련 흉악범죄가 이어지고 있어서다. 지난해 11월에는 전 여자친구를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살해한 ‘김병찬 사건’이 일어났다. 김 씨는 피해자를 살해하기 수개월 전부터 피해자를 상대로 주거침입, 감금, 상해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신변 위협을 느낀 피해자는 경찰에 총 6차례나 신고했으나 결국 죽음을 맞았다. 경찰이 스토킹 범죄 심각성을 확인하고 잠정조치를 해도 법원의 최종 결정이 날 때까지는 가해자를 격리할 수 없는 법의 허점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한 달여 뒤에는 스토킹 범죄자 이석준이 전 여자친구 집을 찾아가 그의 어머니를 숨지게 하고 남동생을 중태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청 통계상으로도 스토킹 범죄는 법 시행 후인 지난해 11월 277건에서 올해 3월엔 2369건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법이 허술하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피해자가 직접 피해 사실을 알리고 처벌을 원해야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가능한 반의사불벌 조항이 대표적이다. 신고 후 피해자가 겪게 되는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다. 가족까지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과 한 번만 봐주면 다시는 안 하겠다는 회유를 받는다.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스토킹 사건은 기소 이후 36%가 공소기각으로 끝난다고 분석하고 있다. 전체 범죄의 공소 기각률이 1%라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자들이 받았을 압박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 괴롭힘’이라는 규정도 모호하다. 얼마나 오랜 기간 영혼을 파괴하는 괴롭힘을 당해야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피해자를 보복 범죄로부터 보호해줄 장치가 없는 게 맹점이다. 신변안전 조치도 피해자가 신청해야 제공된다. 처벌도 가볍다. 가해자 구속비율이 법 시행 후 지난 6월까지 입건된 사람 중 6.2%에 불과하다. 기소된다 해도 실형은 드물고 대부분 벌금형과 집행유예에 그친다. 이렇다 보니 스토킹 피해자들은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못한다.

법이 제정됐지만 스토킹이 범죄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과도한 짝사랑이거나 기껏해야 귀찮게 따라다니고, 만나 달라고 보채는 정도로 치부한다. 스토킹 당하는 사람의 고통은 헤아리지 않고 피해자가 ‘빌미’를 줬다고 수근거리기도 한다. 야당의 한 서울시의원이 신당역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가해자의 일방적인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아 발생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명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집착하는 것은 병적인 소유욕이다.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감정 표출과 집착은 범죄행위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스토킹은 집착 정도가 심해지면서 폭행·상해·살인 등 흉악범죄로 돌변하기 쉽다. 인명사고가 발생하기 전 주거 침입, 폭행 등 전조가 발생하는데 법원이나 경찰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일쑤다. 법원이 지난해 10월 경찰이 신청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범 구속 영장을 기각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누군가가 희생돼야 법을 고친다고 떠들썩하다. 우리보다 스토킹 처벌법이 20, 30년 먼저 제정된 미국 영국 등은 처벌 수위가 높다. 영국에서 스토킹은 최대 징역 10년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다.


신당역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과 충격이 크다. “남의 일이 아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스토킹 범죄 대책에 손놓고 있던 여야 정치권이 반의사불벌 조항을 폐지하는 등 뒤늦게 재발 방지를 위한 입법에 나선다고 한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국회가 개정안 통과에 힘을 모으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제도 보완에 나서야 한다.

이은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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