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겨울 온다" 유럽 사재기에 LNG 값 2배.. 韓도 불똥[인사이드&인사이트]

박상준 경제부 기자 2022. 9.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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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에너지 확보 전쟁
에너지 러 의존도 높은 유럽, 러 가스관 잠그자 가격 요동
제재 실현땐 유가도 비상등.. 한국, 천연가스 전량 LNG 의존
값 뛰면 전력생산까지 차질.. 주력산업 수익악화 발등의 불
이달 5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시민들이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비판하는 집회를 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자원 무기화에 나서면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올겨울 에너지 대란이 발생할 위험이 커지고 있다. 라이프치히=AP 뉴시스
박상준 경제부 기자
“Winter is coming(겨울이 오고 있다).”

세계적인 인기를 끈 미국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북부 지방 ‘스타크’ 가문의 가훈이다. 유례없이 긴 겨울과 함께 인류의 존망을 결정할 전쟁이 다가오니 단단히 대비하라는 뜻인 이 말은 최근 에너지 대란을 겪고 있는 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온라인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으로 쓰이고 있다. 고뇌하는 스타크 가문 영주의 사진에 ‘에너지 대란이 오고 있다(Energy crisis is coming)’라는 등의 대사를 입히는 것이다.

이 밈은 웃어넘길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영국에 사는 리안 애플턴 씨는 최근 스카이뉴스 인터뷰에서 “가스와 전기 등 에너지 요금이 월세보다 비싸다”고 호소했다. 도시가스 계량기를 쳐다보던 애플턴 씨는 “계량기가 내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다. 음식 살 돈을 계량기가 먹고 있기 때문”이라며 “겨울이 오면 아이들을 어떻게 먹여야 할지 걱정된다. 지난 몇 달간 무료급식소에도 다녀왔다”고 말했다. 10월부터 가스와 전기요금이 80% 인상된다는 소식을 들은 애플턴 씨는 그 후로는 식기세척기와 탈수기를 쓰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비롯된 유럽 에너지 대란의 불똥이 올겨울 한국에도 튈 것으로 전망된다. 각국이 겨울철 난방에 필요한 에너지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에 나서면서 한국도 수입에 의존하는 에너지 가격의 급등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전쟁과 유례없는 인플레이션, 공급망 위기 속에서 세계 각국은 올해 유난히 혹독한 겨울을 경험할 것으로 보인다.
○ 전쟁과 제재에 유럽 에너지 확보 초비상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최근 1년 새 3배 가까이로 뛰었다. 19일 투자정보업체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 지표인 네덜란드 TTF 선물 가격은 지난해 9월 16일 MWh(메가와트시)당 63.25유로에서 이달 16일 187.79유로로 급등했다.

천연가스 가격 폭등의 주범은 러시아다. 러시아는 자국과 독일을 오가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을 수시로 여닫으며 천연가스 가격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유럽 전체 가스 공급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이 가스관이 막히자 천연가스 가격은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러시아는 이달 5일 “서방국가들이 제재를 해제할 때까지 가스관을 폐쇄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에너지 무기화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러시아의 이런 협박이 잘 먹히는 것은 유럽의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유럽연합(EU)과 영국의 천연가스 소비 중 러시아산 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25%였지만 지난해 32%까지 늘었다. 지난해 독일은 가스 공급량의 절반을 러시아에 의존했고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의존도가 70%를 넘었다. 반면 EU가 자체 생산하는 가스의 비중은 2009년 38%에서 지난해 17%로 줄었다. 유럽 국가들은 기후 및 안전 문제 대처를 위해 석탄과 원자력 발전 비중을 줄여왔는데 이는 전쟁 등 예기치 못한 재난을 맞아 에너지 대란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원유도 비상이다. 최근 달러 강세로 인해 유가가 하락했지만 1년 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매우 높다. 지난해 9월 16일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75.67달러였지만 1년 뒤인 이달 16일 91.35달러로 20.7% 상승했다. 여기에 이달 5일 산유국 협의체 ‘OPEC플러스(OPEC+)’는 다음 달 하루 원유 생산량을 이달보다 10만 배럴 줄인다고 발표하면서 원유 시장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러시아 제재도 불안 요인이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11일 EU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방침과 관련해 “유가 급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올 4분기(10∼12월)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98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 글로벌 공급 부족에 한국도 ‘불똥’

천연가스 전량을 액화천연가스(LNG)로 조달하는 한국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도시가스 요금이 원료인 LNG 가격에 따라 결정되는데 유럽이 천연가스 대신 LNG를 확보하기 위해 사재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된 LNG 10월물 JKM(한국과 일본 시장의 가격지표) 선물 가격은 지난 1년간 MMBtu(열량 단위)당 23.42달러에서 42.16달러로 80% 급등했다.

LNG 가격이 오르거나 공급이 부족해지면 당장 전력과 도시가스 생산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전력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발전에 사용된 연료 중 83%는 유연탄(석탄)이고 15%는 LNG다. LNG는 발전 효율이 석탄의 2배나 되는 귀중한 연료라서 공급이 부족하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또 LNG로 만드는 도시가스 소비도 매해 증가하는 등 수요도 늘어난 상태다.

유럽 에너지 대란과 국제유가의 불안은 가뜩이나 고공행진 중인 국내 물가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를 넘는 국가인 데다 수입 규모도 계속 늘고 있어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에너지 수입액은 1025억 달러로 지난해 상반기(569억 달러)에 비해 약 80% 증가했다. 에너지 수입액이 늘면 국내 물가가 오를 뿐 아니라 무역적자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산업에도 위기감이 커졌다. 한은에 따르면 러시아가 유럽에 가스 공급을 중단하면 국제 에너지 수급이 불안해지면서 국내 주력 산업의 생산 차질과 원가 상승 위험이 커진다. 가령 화학산업에서는 주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상승해 수익성이 악화되고, 전기를 많이 쓰는 철강산업은 전기요금 인상에 따라 원가 상승이 불가피하다. 유럽산 핵심 중간재를 공급 받는 한국의 조선, 반도체, 자동차 산업의 경우도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 “장기적으로 에너지 안보와 공급 다변화 필요”

에너지 위기에 대응해 유럽 국가들은 난방 온도 제한, 전기 사용 한도 설정 등 고육지책을 도입하고 있다. 비록 한국은 유럽 국가들보다 사정이 낫지만 에너지를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만큼 당장 올 겨울철에 대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에너지 공급을 갑자기 늘릴 수 없다면 절약을 유도하는 것이 단기적으로 유일한 대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고물가 국면의 가장 큰 걱정은 겨울”이라며 “유럽이 전기 절약을 호소하듯이 우리도 에너지 수입을 다변화하는 동시에 국민들에게 전기를 아껴 써달라고 호소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중장기적으로는 에너지 공급을 다변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박호정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자원보유국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기업의 초기 탐사 및 개발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에너지 가격 변동성이 더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민간과 공공이 다시 해외 자원 개발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상준 경제부 기자 speak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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