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벼랑 끝 한국 기업들

장박원 2022. 9. 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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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재고 증가율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출·내수 부진 이중고
규제개혁·지원 확대로
혁신생태계 구축 서둘러야
기업은 망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재고가 쌓인다. 제품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늘면 공장 가동과 인력을 줄인다. 투자 계획을 유보하거나 철회한다. 손실을 감수하고 떨이로 제품을 처분하기도 한다. 그래도 재고를 줄이지 못하면 문을 닫아야 한다. 재고 증가는 기업들에 위험한 시그널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제조업의 재고지수 증가율은 18%로 외환위기 이후 26년 만에 가장 높았다. 재고는 계절 요인이나 경기 변동에 따라 늘거나 줄기 마련인데 작년 2분기 이후 1년 동안 증가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산업 생태계의 상부에 있는 대기업 재고가 더 빠르게 늘고 있는 것도 불길하다. 전자와 정유 등 주력 수출 업종의 2분기 재고 증가율은 50%가 넘었다. 그 여파는 곧 중소 협력업체로 확산될 것이다.

문제는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경제지표가 기업을 압박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8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증가율은 8.3%로 시장 예상치를 웃돌았다. 에너지 가격이 떨어졌는데도 미국 물가가 잡히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풀었던 막대한 자금이 여전히 물가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실업률은 3%대를 유지하고 있다. 아직 경기 침체를 염려할 정도가 아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이상 올리는 등 고강도 긴축 기조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글로벌 투자와 수요가 위축되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기업들은 힘겨운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 와중에 원·달러 환율은 치솟고 있다. 대부분의 원자재를 해외에서 들여오는 우리 기업들의 생산 비용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고환율은 국내 물가를 끌어올려 내수 경기에도 타격을 준다. 기업은 미국의 금리 인상 여파로 수출이 줄고 국내 판매도 부진한 이중고를 겪게 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으로 유발된 공급망 재편도 우리 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 기업의 고위 임원은 이런 고충을 털어놓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밀어붙이고 있는데 솔직히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불리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인건비 등 생산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을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짧은 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자유무역에 기반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있었다. 한국만 혜택을 본 것은 아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고, 미국과 유럽 소비자들도 싼값에 양질의 제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제 WTO 체제는 지나가 버린 '좋은 시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미국과 중국을 선택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한국 기업들에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두 곳 모두 중요한 생산기지이자 거대 시장이기 때문이다.

해법은 없을까. 위기 요인이 복합적이라 쉽지는 않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면 된다. 인공지능과 로봇,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안하고 한발 앞선 시장 예측으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혁신 역량을 갖추고 있다. 다만 정부와 정치권의 안이한 대응이 걱정이다. 반도체 산업만 해도 다른 나라들은 신속하게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우리는 말뿐이다. 반도체특별법은 발의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국회에서 심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우리 기업의 불이익을 막을 경제 외교도 불안하기만 하다. 혁신의 걸림돌이 되는 규제 환경도 마찬가지다. 규제 개혁을 외치는 소리만 요란할 뿐 성과는 별로 없다. 우리 경제와 기업에 어떤 위기가 덮칠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합쳐 위기를 기회로 바꿀 혁신생태계를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경기 침체의 높은 파고에 휩쓸려 난파할 수 있다.

[장박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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