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비밀특허'를 아시나요

2022. 9. 2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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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다룬 영화 '한산'에는 전작에선 볼 수 없었던 흥미로운 장면이 눈에 띈다. 일본군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거북선(구선)의 설계도를 둘러싸고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펼쳐진 첩보전이 그것이다. 이순신과 그의 부장 나대용은 출정 여부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일본군에게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말을 아끼는 한편, 순천부 선소에서 비밀리에 문제점이 개선된 거북선을 개발한다. 이러한 첩보전 끝에 한산대첩 당일 새로운 거북선은 일본 수군의 허를 찌르고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한다.

한편 기술을 지키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역사도 있다. 한산대첩보다 100여 년 이상 앞선 1453년, 동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동로마제국과 신흥강국 오스만제국이 격돌한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은 일명 '불 뿜는 도마뱀'이라는 청동대포로 수세기 동안 난공불락이라 여겼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 신무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오스만제국이 아닌 유럽의 발명가 우르반이 만든 것이었다. 헝가리 출신의 우르반은 당시 동로마 황제가 새로운 발명품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자 오히려 적국을 찾아가 자신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기록들로부터 '기술의 비밀'을 유지하는 기술 안보의 중요성과 함께 '비밀특허' '비밀디자인' 제도의 필요성을 엿볼 수 있다. 특허제도와 디자인등록제도는 제3자에게 공개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허권, 디자인권과 같은 독점권은 자신의 창작을 숨겨두지 않고 공중에 공개한 자에게 국가가 부여하는 제도적 인센티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디자인의 경우, 물건의 겉모습에 관한 것이라 일단 공개되면 모방이 쉽다. 그러므로 출원인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악의적인 모방과 도용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를 위해 디자인보호법은 출원인이 '비밀디자인'을 청구할 경우 등록된 디자인도 최장 3년까지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특허에도 이와 비슷한 '비밀특허제도'가 있다. 특허법에 따르면 정부는 국방상 필요한 경우 특허출원 자체를 금지하거나 해당 출원을 비밀로 취급할 수 있고, 나아가 외국에 출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강력한 조치도 가능하다. 이 제도에 따르면 '거북선'과 같이 중요한 군사적 발명에 대한 특허출원은 비밀로 취급돼 공개로 인한 기술 유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불 뿜는 도마뱀' 같은 신무기를 외국에서 특허출원하는 것도 금지할 수 있다.

비공개제도는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데, 기왕 소유하게 된 독점권을 비밀로 간직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알리는 것이 경영전략 측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비공개제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유럽발 지정학적 위기로 인해 국가안보의 개념이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 기술로까지 확대되면서 주요 기술 선진국들이 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거나 보호하는 수단으로 비밀특허제도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어느덧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 유망산업 분야에 있어서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다. 특허청도 국가의 핵심기술이 해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비밀 대상 범위를 넓히고 벌칙 규정을 신설하는 등 비밀특허제도를 개선할 계획이다.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격랑 속에서 나대용의 거북선, 우르반의 청동대포가 주는 교훈을 반추해볼 때다.

[이인실 특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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