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의 여행이라는 꽃다발 <17> 충남 논산] 내 마음에 새겨진 영롱하고 기품 있는 무늬
여행지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땅 논산. 육군훈련소와 딸기밭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약간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몰랐던 뜻깊은 여행지가 가득하다.
논산은 충청도 유교의 본산이다.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 조선의 정치와 정신문화를 이끌었던 선현들이 논산에서 태어났다. 이런 까닭에 논산에는 서원과 향교가 많다.
돈암서원은 논산에서 가장 큰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조선 최고의 예학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구봉 송익필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어받아 17세기 조선 예학을 정비한 예학의 대가다.
예학이 대두된 계기는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등으로 혼란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거듭된 전란으로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신분제는 위태로워졌다. 각종 범죄도 늘어갔다. 김장생은 무너지는 사회질서를 확립할 대안으로 예(禮)를 제시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법전의 정비와 예학의 정립은 일상의 삶의 원칙과 기준을 정한다는 점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장생이 주장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예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의 형식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에 따라 변한다.’ 그는 예의 가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 있으며,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다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예의 원리와 실천은 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서 놀랍다.
낙관을 찍어놓은 듯 멋스러운 꽃담
돈암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응도당이 눈에 들어온다. 서원 건물로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응도당을 자세히 보면 천장과 지붕의 모습이 조금 특이하다. 지붕 아래 작은 지붕이 덧대어져 있는데 이를 눈썹처마라고 한다. 응도당에는 양쪽으로 눈썹처마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누마루에 비치는 여름 햇살도 가려준다.
응도당을 지나 숭례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숭례사 들어가는 입구의 좌우 꽃담은 김장생이 설파했던 예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흰 벽에 낙관을 찍어놓은 듯 전서체로 새겨진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이렇게 멋스러운 꽃담을 지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아름다운 모양도 탄성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글씨에 담긴 생각과 사상은 겉모습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다.
담에 새겨진 열두 자의 글씨는 ‘서일화풍(瑞日和風)’ ‘지부해함(地負海涵)’ ‘박문약례(博文約禮)’. ‘서일화풍’은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의 뜻.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부해함’은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주듯 모든 것을 포용하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박문약례’. 이는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의미다. 500년 전의 주장이고 이론이지만 지금 들어도 전혀 낯설거나 구태의연하지 않다. 오히려 요즘 세상에 더 큰 울림을 주는 것만 같다. 일상생활에서도 사소한 예가 사라지고 큰소리와 이기심만이 판을 치는 세상. 김장생의 가르침은 현대에서도 적용 가능한 지침일 뿐만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과서인 듯하다.
조선 사대부의 꼿꼿한 정신
돈암서원의 꽃담과 김장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명재고택으로 향한다. 조선 숙종 때 선비 명재 윤증(1629~1714)의 고택이다. 고택이라는 명칭에 선뜻 수십 칸 저택을 상상했다가 실제로 보고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사대부집이지만 행랑채가 없고 울타리도 없이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작은 연못 건너 평범해 보이는 대문과 사랑채, 아담한 마당과 대청마루, 광채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명재는 재야의 백의정승이었다.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등 수많은 벼슬이 내려왔지만, 단 한 번도 곁눈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에게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은 한때 그의 스승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택 앞에는 항아리가 수백 개 도열해 있다. 왼쪽 장독대 항아리 뒤쪽으로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들이 병풍처럼 서 있다. 명재고택에는 항아리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는 전독간장이 유명한데, 종가만의 전통 비법으로 만드는 이 간장 한 숟가락이면 아픈 배가 낫는다고 전해진다.
명재고택의 아궁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굴뚝 키가 무척이나 작은데 이는 보릿고개 때 굴뚝의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배고픈 사람들이 이 연기를 보고 힘들어할까 봐 배려한 것이다. 명재고택의 주인들은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의 선행 덕택에 소실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다. 동학란 때에는 동학군이 부잣집을 불태울 때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고택을 보호해주었다. 한국전쟁 때도 미 공군이 명재고택을 폭격하려 했지만, 당시 조종사가 명재고택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어서 일부러 다른 곳에 폭탄을 떨어트렸다고 한다.
논산 여행의 마지막은 탑정호다. 해 질 때 풍경이 참 고즈넉한 곳이다. 충청남도에서 예산의 예당호 다음으로 넓다. 호수를 일주하는 도로가 잘 나 있어 논산과 인근 주민들이 드라이브하러 많이 찾는다.
여행수첩
먹거리 먹거리로는 연산면의 순대가 유명하다. 연산시장과 인근에 순대집들이 많다. 연산원조할머니순대는 이 지방의 전통 방식으로 순대를 빚는다. 탑정호 주변에는 민물매운탕집이 많다. 신풍매운탕, 붕어마을 등이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곳. 연산에 자리한 고향식당은 도가니탕으로 유명한 곳. 힘줄 같은 것은 쓰지 않고 국내산 한우 도가니만을 사용한다.
친근한 생김새의 고려 불상 논산에서 꼭 봐야 할 것은 관촉사의 ‘은진미륵’이다. 정식 이름은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호). 고려 때 세운 불상으로 높이가 18m, 둘레가 9m를 넘는다. 크기로 따지면 국내 미륵불 가운데 가장 크다. 생김새도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오던 부처와는 여실히 다르다. 우스갯소리로 하자면 가분수다. 머리가 몸체에 비해 유난히 크다. 눈은 길게 옆으로 찢어진 데다 부리부리하며 코는 넓적하고 귀는 축 늘어졌다. 머리에는 졸업식에서 볼 법한 사각모 같은 갓을 썼는데 약간 괴이하게 보이기도 한다. 당시 은진미륵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은진미륵 보았니’라며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였다고 한다.
▒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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