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바지와 헤어질 결심

칼럼니스트 최은경 2022. 9. 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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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육아] 소비를 줄이고 오래 입는 것은 지구를 위한 행동

이 바지를 산 게 언제인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름이면 항상 꺼내 입는 바지. 분명 입었는데 안 입은 것 같은 느낌이라 더운 날에는 이만한 옷이 없었다. 해가 갈수록 엉덩이 부분이 좀 바랜다 싶었는데 드디어 며칠 전 찢어졌다. 

찢어진 오래 된 바지. ⓒ최은경

그랬다. 세상에는 찢어질 때까지 입는 바지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 바지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했다. 찢어져도 그냥 입었다. '집에서 입는 거니까... 뭐 어때.' 그러다가 열두 살 둘째 아이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말하는 걸 듣게 되었다.  

"엄마, 그 바지 찢어졌어. 모르고 입은 거야?"

"알아, 그래도 이 바지가 너무 편해서 못 버리겠어."

"그래도... 엄마, 그게 뭐야... 게다가 엉덩이 부분인데... 버려야지."

딸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언젠가 친정엄마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계절마다 옷 정리를 하다가 나는 안 입지만, 이모가 입으면 잘 어울릴 만한 옷들을 챙겨서 보내곤 했다. 그걸 본 엄마가 "얘, 이건 나한테 더 잘 어울리겠다"며 주섬주섬 챙기는 걸 본 뒤로는 엄마에게 준다.

엄마는 좀처럼 옷을 사는 법이 없고(제일 쓰기 아까운 돈이 옷 사는 데 쓰는 거라는) 조금이라도 불편한 옷은 절대 입지 않는다. 엄마가 옷을 고르는 기준은 단 하나, 피부에 닿는 면이 부드러운가 하는 점이다.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면 몇 년을 상관없이 그 옷만 마르고 닳도록 입는다. 그래서 내 옷 중에서도 부들부들한 면으로 만든 게 있으면 엄마에게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낡고 색이 바랜 옷을 입고 나타났다. 평소 입고 다니는 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엄마에게 불만이 많았던 나는 그날 온 신경질을 그러모아 짜증을 냈다. 

"엄마는 옷이 그게 뭐야. 사서 입는 것까진 안 바라는데... 내가 준 옷도 많잖아. 굳이 이렇게 다 떨어진 옷을 입어야겠어? 남 보기 민망하게..."

"야야, 남들이 보는 게 뭐가 중요하니? 내가 편하면 그만이지. 이 면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이런 건 잘 안 팔지도 않아. 참 보드랍고 좋기만 한데 넌 대체 왜 그러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엄마의 편함과 나의 편함이 뭐가 달랐을까 싶다. 엄마는 본인이 운전을 하기 때문에 조금 낡은 옷을 입어도 보는 사람은 대부분 가족이고, 운전을 못하는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남이 보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차이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물건을 아껴 쓰고 소비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요즘 사람들에게 핫한 트랜드다. 너무 많은 소비가 지구를 아프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엄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친환경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었던 거다. 엄마의 친환경적 소비를 내가 미처 몰라본 것일 뿐. 

생각해보니 둘째 아이도 옷을 여러 벌 사지 않는다. 언니에게 물려받은 옷도 많고 내가 철마다 여러 벌 사주기도 했지만 이젠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옷을 사지 않는다. 내가 기껏 신경 써서 사주는 옷은 예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다면서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거의 교복을 입는 것처럼 마음에 드는 옷 한두 벌을 계절이 바뀔 때까지 돌려 입으니 돈 써 봤자 소용 없다는 걸 알아서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겠나. 다 큰 아이에게 내가 좋아하는 옷을 억지로 입혀 보낼 수도 없고, 게다가 환경보호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내 아이의 이런 취향은 손뼉 치고 환영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하니까. 문제라면 남의 이목을 신경 쓰는 나다. 그 신경을 살짝 끄기만 하면 될 일이다.   

얼마 전 회사를 통째로 기부해서 화제가 된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 회장도 낡고 오래된 옷을 입으며 살고 있다고 했다. 포브스가 발표한 '억만장자' 임에도! 기업의 탄생부터 끝까지 '지구를 위한' 일관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지난 주말 집 정리를 하면서 정리한 옷들. ⓒ최은경

지난 주말 집 정리를 하면서 오래된 바지와 드디어 헤어질 결심을 했다. 찢어질 때까지 입을 수 있는 옷은 옷장에도 이미 많으니까. 이번처럼 잘 입고 버리면 된다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더불어 계절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새 옷을 사지 말자는 결심도. 그나저나 곧 있으면 엄마의 이사인데... 엄마는 낡은 옷이며 물건들과 헤어질 결심을 잘하고 있으시려나.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성에 대해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서 성교육 전문가에게 질문한 성교육 책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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