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밥통 없는 나라의 조용한 금융혁신 [매경데스크]

김선걸 2022. 9. 19.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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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주식 낮거래 서비스
美SEC의 규제혁신이 발단
韓금융 규제 혁신 걸림돌
인적청산으로 뿌리뽑아야
미국 주식에 꽤 큰 금액을 투자하는 지인이 있다.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매매를 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점심약속에 나와 식사 중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가 요즘은 낮에 거래한다. 한 증권사가 내놓은 서비스 덕이다. 한국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미국 주식을 한국 주식 사고팔 듯 거래할 수 있게 됐다.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서학개미'들에겐 일상을 뒤집은 혁신이다. 이 혁신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궁금해서 추적해봤다.

발단은 '블루오션'이라는 미국의 신생 대체거래소였다. 블루오션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현지 야간 주식매매 서비스를 승인받은 게 시작이었다. 미국은 NYSE, 나스닥, 아멕스 등 정규거래소 외에도 현재 31개의 대체거래소를 허용하고 있다. 정규거래소 영업이 끝난 밤시간 주식거래 중개로 새 시장 개척에 도전한 것이다.

국내 증권사 직원이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미국 언론에 게재된 블루오션 기사를 봤다고 한다. 미국에서 야간거래면 한국으론 주간거래였다. 연락처를 찾아 블루오션에 이메일을 보냈더니 30분 만에 답변이 왔다. 미국서 싹틔운 야간거래사업이 지구 반대편 한국 주간거래사업으로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서학개미들에겐 반향이 컸다. 5개월 만에 누적거래액이 2조원을 넘어섰다.

이 혁신 스토리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첫째로 대체거래소를 포함해 40개 안팎의 거래소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신사업을 만들어내는 미국 증시의 환경이다. 경쟁은 결국 고객들에게 좋은 서비스로 귀결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한국거래소(KRX)가 60여 년간 독점하며 고객과 기업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극명하게 대조된다.

둘째, 밤시간 주식거래를 선뜻 허가한 미국 금융당국의 혁신친화적 태도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대체거래소 한 곳을 설립하자는 제안도 10년째 시간을 끌며 불허하고 있다. 야간거래 제안은 아예 불가능하다. 미국처럼 네거티브시스템(포괄주의 규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한국의 포지티브시스템(열거주의 규제)에선 정부가 정해주는 사업만 해야 한다. 민간이 정부를 앞서는 요즘엔 마차가 말을 끄는 격이다. 금지하는 것 외엔 뭐든 자유로운 포괄주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실 '자유와 창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특징이자 발전 원동력이다. 삼성·현대차 같은 글로벌 기업, BTS·오징어게임 같은 한류의 물결, 골프·축구·야구 등 스포츠까지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도전이 한강의 기적을 거듭하며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단지 정치권력과 관(官)의 입김이 큰 분야는 예외다. 대표적인 것이 금융이다. 규제가 기득권의 철밥통을 보호한다.

규제를 놓지 않는 모피아(범기재부 관료), 모피아를 압박해 낙하산 인사에 개입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이권에 집착하는 노조, 정치권에 줄을 대 자리를 차지한 금융사 최고위 인사들까지 견고한 먹이사슬이 틈새가 없다.

자유를 추구하는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컨트롤타워를 한솥밥 먹던 모피아들이 점령했다. 전 정권 낙하산인 금융사 인사들은 색깔만 바꿔 줄을 대고 있다. 평균연봉 억대의 은행원들이 돈을 더 달라고 파업에 나서고, 국회에선 파업을 조장하는 입법이 진행된다.

금융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산업이다. 이제는 가상화폐 등으로 국경을 가리지 않고 광속 진화하고 있다.

미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NYSE와 나스닥만 합해 총 52조달러다. 세계 주식시장의 41%를 차지하는 이런 공룡도 '주식 야간거래'처럼 끝없는 도전과 혁신을 조용히 실행하고 있다. 한국 증시는 1조6000억달러 규모로 미국에 상장된 한 종목 시총보다도 작다. 그런데 철밥통 규제에 붙들려 있다.

먹이사슬의 적폐는 넓고 깊다. 네거티브 규제로 판을 바꿔야 할 텐데 해낼 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금융가의 전면적인 세대교체 외엔 답이 없다.

[김선걸 부국장 겸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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