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김일성론' 논파해 센세이션..정치학자 서대숙 박사 별세(종합)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북한 공산주의운동 연구 1세대이자 김일성 연구의 대가인 서대숙(徐大肅·Dae-Sook Suh) 박사가 지난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7일 전했다. 향년 91세. 고인의 아들 케빈 서씨는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에서 "13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장례예배는 10월3일 LA 교외 웨스트레이크 빌리지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931년 독립운동을 하려고 만주로 이주한 서창희 목사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 1950년 연희대(연세대) 정법대에 입학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군 통역관으로 일했다. 195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텍사스 기독교대 정치학과, 인디애나대 대학원을 거쳐 1964년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 박사 과정에 다닐 때 영국에서 온 교환교수로부터 "한국에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없었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을 계기로 '조선공산주의운동사'를 연구했다. 1967년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책으로 나온 그의 박사학위 논문 '조선공산주의운동사'는 가짜설이 나돌던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무장투쟁 경력을 학문적으로 논증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70년 컬럼비아대 출판부에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까지 나오며 일약 북한 연구 권위자로 국제 정치학계에 데뷔했다.
그는 특히 '김일성이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고 학술적으로 논증, 북한에 대한 객관적 연구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김일성의 날조되고 미화된 독립운동도 엄격히 지적했다. 그런 이유로 오랜 세월 남북한 모두에서 '의혹'과 '감시'를 당해야 했다.
고인은 1964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 전문연구위원, 1965∼1972년 휴스턴대 정치학과 교수, 1972∼2004년 하와이대 정치학 교수, 1972∼1995년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장으로 일하며 한국과 북한의 현대사·정치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74년 유엔대표부를 통해 공식으로 북한 비자를 받아서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남북한에서 모두 논란이 일었다. 훗날 재방북했을 때 황장엽 당시 김일성대 교수가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는 등 북한에서 그를 '민족적 양심이 있는 학자'로 먼저 인정했다. 고인은 황 교수와 1997년 망명 직전 도쿄에 머물 때와 서울로 온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교유했다.
한국 정부의 의혹이나 감시 같은 활동이 끝난 것은 노태우 대통령 때였다. 1989년 서울대 초빙교수, 1999∼2000년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 2000년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장·북한대학원장으로 일했다. 고인은 인터뷰에서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주체사상이 널리 유행하니까, 정부 사람들이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나 같은 사람이 주체사상이 뭔지 가르치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1989년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서울대에서 1년간 '북한개론'을 가르쳤습니다."라고 했다.
북핵에 대해 "개인적으론 북한이 핵 개발을 하는 건 싫지만, 미국이 핵실험을 시작하고 핵무기를 가장 먼저 사용했듯, 주권국가로서 북한에도 권리는 있다, 일방적으로 북핵만 비난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논지를 폈다.
독립기념관에 항일독립운동 관련 자료 3천700여점을 기증해 '서대숙 문고'를 만들었고, 한신대에 준 북한 관련 자료 7천여점은 '서대숙 통일역사문화자료실'에 보관됐다. 그의 자료 목록에는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과정과 권력세습, 주체사상 형성과정, 공산화 과정 등 최근까지의 북한 정치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김일성 면담 기록은 "김일성 주석을 처음 만났을 때 비공개하기로 약속했으니 지키고 싶다"며 비공개했다. 조만간 공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에서 나온 저서로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1989),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1989),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2000), '한국과 러시아 관계: 평가와 전망'(2001), '북한문헌연구 : 문헌과 해제'(2004), '간도 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2008) 등도 있다.
지난해 8월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라는 책으로 유명한 이정식(李庭植)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작고한 데 이어 서 교수까지 타계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한 북한 연구 1세대 학자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난 셈이 됐다.
1988년 고인의 지도로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홍득표 인하대 명예교수는 "학위논문이 심사를 통과한 뒤 제 가족까지 불러서 식사를 함께하며 '언젠가 당신도 유명한 학자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주셨을 정도로 따뜻한 분"이라며 "한눈팔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고 회고했다.
유족은 부인과 사이에 미국 변호사인 2남(모리스 서·케빈 서)이 있다. 장남 모리스 서(Maurice Suh)는 LA 부시장과 캘리포니아주 중앙검찰청 차장검사 등을 지냈다.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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