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붕 열일곱 옹기종기.. '고국의 향수' 붓칠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1호 유럽 미술 유학생 배운성
가난한 집안 형편에 15세 때
재력가 집에 서생으로 들어가
독일 유학 후에 미술에 눈떠
6·25때 월북.. 한때 언급 금지
서양화 양식·동양적 개성 융화
서구 미술계에 신비로운 인상
길이 2m 화폭 가득찬 '가족도'
주인집 일가 왼쪽 끝 본인 묘사
#가을의 시작과 추석
올해 가을 시작은 미술 관계자들에게 온통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이었다. 9월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에 걸쳐 코엑스에서는 두 아트 페어가 함께 개최되었다. 국내 대표 아트 페어인 키아프와 세계 3대 아트 페어로 손꼽히는 프리즈가 동시에 열리니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약 7만여명이 찾았다는 두 행사는 많은 논의점을 남겼는데 각기 다른 입장을 가졌더라도 모두 바라는 바는 같았다. 이를 계기로 서울이 국제적인 미술 도시로 자리 잡기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생충’, BTS, ‘오징어 게임’ 등의 성공이 보여준 한국 문화의 저력이 순수 미술에서도 더 잘 드러났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이러한 가운데 얼마 전 뉴스에서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LA카운티뮤지엄이 LA카운티뮤지엄에서 ‘사이의 공간: 한국 미술의 근대’전을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전시는 한국 근대 시기를 주제로 서구권 국가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기획전이다. 근대를 살아낸 화가, 조각가, 사진가 약 90여명의 작품 130여점을 출품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격렬했던 한국 근대 시기를 고스란히 담은 당시 미술 작품들을 서구권에 선보이는 신호탄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관련 내용을 읽으며 작가와 작품을 살펴보다 보니 배운성(1900∼1978)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추석을 앞두고 항상 떠오르는 ‘가족도’(1930∼1935)를 그린 화가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유럽 미술 유학생
배운성은 서생 생활 동안 영리하고 성실하게 일해 백인기의 총애를 받은 듯하다. 학업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고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과 함께 일본을 거쳐 192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음악을 즐기고 한량처럼 사는 아들의 방탕한 생활을 막으려는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 박물관, 미술관에서 크게 감명받은 배운성은 그림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925년 베를린 국립미술종합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 베를린엔 다다이즘이 성행했지만, 고전적인 서양화풍에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배운성은 유럽에서 시작한 예술가로서의 삶이 만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를 졸업한 1930년 그린 ‘자화상’(1930)에 드러나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지닐 수 있었던 것에는 실력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된 듯 싶다. 서양화 양식을 취하면서 그림의 소재와 기법 면에 동양적 특성을 포함한 그의 작품은 서구 미술계에 신비로운 인상을 남기며 주목받았다. ‘귀가’(1938)가 대표적인데 실제로 그는 “나의 목표는 서양인이 그리는 서양화와 동양인이 그리는 서양화 간에 생기는 거리를 없애고 완전한 융화 속에서 실감을 체득하는 데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가족’이 지닌 중요한 의미
배운성은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인정받으며 활동 배경이 되는 국가도 넓혔다. 파리 살롱 도톤, 바르샤바 만국목판화 전람회 등에 작품을 출품해 수상했다. 함부르크 민속미술박물관을 거쳐 파리의 주요 갤러리였던 샤르팡티에에서 개인전을 마련하며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며 1940년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침공당했다. 다급한 상황에 그림도 챙기지 못하고 급히 몸만 피해 18년 만에 귀국했다.
배운성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지도자로서도 활발히 일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홍익대학교에 미술대학을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초대 학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경주예술학교 명예 학장으로 추대되어 미술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전쟁을 피해 찾은 고국에서도 십여년 만에 전쟁이 발발했고 삶은 다시 요동쳤다. 9·28 수복을 전후로 하여 이념을 따라 월북했고 한국에서 그의 작품은 한동안 공개와 언급이 금지당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은 백인기의 가족으로 알려졌다. 그림 가장 왼편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이를 배운성으로 본다. 다수 자화상에 등장했던 작가의 얼굴과 닮았기 때문이다. 작품은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다양한 한복과 소품에서 당시 옷차림과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미술사에 흔치 않은 대가족 초상화라는 이유도 있는데 이처럼 전쟁 전에 그려진 가족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중섭, 장욱진 등이 가족을 주제 또는 소재 삼아 다수의 작품을 남겼지만 모두 전쟁 이후다. 즉, 긴 유럽 생활을 통해 얻은 서구적 가족 초상 개념을 적용해 일찍이 그려낸 그림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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