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붕 열일곱 옹기종기.. '고국의 향수' 붓칠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2022. 9. 17. 15: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92) 가을, 추석, 가족
1호 유럽 미술 유학생 배운성
가난한 집안 형편에 15세 때
재력가 집에 서생으로 들어가
독일 유학 후에 미술에 눈떠
6·25때 월북.. 한때 언급 금지
서양화 양식·동양적 개성 융화
서구 미술계에 신비로운 인상
길이 2m 화폭 가득찬 '가족도'
주인집 일가 왼쪽 끝 본인 묘사

#가을의 시작과 추석

올해 가을 시작은 미술 관계자들에게 온통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이었다. 9월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에 걸쳐 코엑스에서는 두 아트 페어가 함께 개최되었다. 국내 대표 아트 페어인 키아프와 세계 3대 아트 페어로 손꼽히는 프리즈가 동시에 열리니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약 7만여명이 찾았다는 두 행사는 많은 논의점을 남겼는데 각기 다른 입장을 가졌더라도 모두 바라는 바는 같았다. 이를 계기로 서울이 국제적인 미술 도시로 자리 잡기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생충’, BTS, ‘오징어 게임’ 등의 성공이 보여준 한국 문화의 저력이 순수 미술에서도 더 잘 드러났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이러한 가운데 얼마 전 뉴스에서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LA카운티뮤지엄이 LA카운티뮤지엄에서 ‘사이의 공간: 한국 미술의 근대’전을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전시는 한국 근대 시기를 주제로 서구권 국가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기획전이다. 근대를 살아낸 화가, 조각가, 사진가 약 90여명의 작품 130여점을 출품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격렬했던 한국 근대 시기를 고스란히 담은 당시 미술 작품들을 서구권에 선보이는 신호탄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관련 내용을 읽으며 작가와 작품을 살펴보다 보니 배운성(1900∼1978)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추석을 앞두고 항상 떠오르는 ‘가족도’(1930∼1935)를 그린 화가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유럽 미술 유학생

이제 서울에서 세계적 미술 행사가 열리고 해외에서 대규모 한국 미술 전시 소식을 듣는 시대이지만 우리나라에 ‘미술’이라는 용어와 전시가 생긴 것은 15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조선에 이르기까지 글과 그림이 함께하는 서화를 다루었기에 회화, 조각 등으로 구체화하는 미술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항을 거치고 근대기에 다다라서야 사람들은 미술이라는 세계 공통의 언어를 인식할 수 있었다. 1883년 한성순보를 시작으로 ‘미술’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고희동이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워오며 그 단어에 창작의 의미가 더해졌다.
LA카운티뮤지엄에서 개최하는 ‘사이의 공간: 한국 미술의 근대’전에 출품되는 배운성의 작품 ‘가족도(1930~1935)’. 개인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배운성은 고희동 등 근대기 화가 대부분이 일본 유학을 떠나 서양 미술을 배운 것과 달리 직접 유럽에 가서 그림을 배운 유럽 유학 제1호 화가다. 일제강점기에 유학을 떠났으니 재력 있는 집안의 자제였을 것으로 연상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1901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학업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라 15세 무렵 금융인이자 사업가였던 백인기의 집에 서생으로 들어갔다. 백인기는 그의 호화로운 별장 생활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인물이었다.

배운성은 서생 생활 동안 영리하고 성실하게 일해 백인기의 총애를 받은 듯하다. 학업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고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과 함께 일본을 거쳐 192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음악을 즐기고 한량처럼 사는 아들의 방탕한 생활을 막으려는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 박물관, 미술관에서 크게 감명받은 배운성은 그림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925년 베를린 국립미술종합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 베를린엔 다다이즘이 성행했지만, 고전적인 서양화풍에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배운성은 유럽에서 시작한 예술가로서의 삶이 만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를 졸업한 1930년 그린 ‘자화상’(1930)에 드러나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지닐 수 있었던 것에는 실력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된 듯 싶다. 서양화 양식을 취하면서 그림의 소재와 기법 면에 동양적 특성을 포함한 그의 작품은 서구 미술계에 신비로운 인상을 남기며 주목받았다. ‘귀가’(1938)가 대표적인데 실제로 그는 “나의 목표는 서양인이 그리는 서양화와 동양인이 그리는 서양화 간에 생기는 거리를 없애고 완전한 융화 속에서 실감을 체득하는 데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가족’이 지닌 중요한 의미

배운성은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인정받으며 활동 배경이 되는 국가도 넓혔다. 파리 살롱 도톤, 바르샤바 만국목판화 전람회 등에 작품을 출품해 수상했다. 함부르크 민속미술박물관을 거쳐 파리의 주요 갤러리였던 샤르팡티에에서 개인전을 마련하며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며 1940년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침공당했다. 다급한 상황에 그림도 챙기지 못하고 급히 몸만 피해 18년 만에 귀국했다.

배운성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지도자로서도 활발히 일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홍익대학교에 미술대학을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초대 학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경주예술학교 명예 학장으로 추대되어 미술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전쟁을 피해 찾은 고국에서도 십여년 만에 전쟁이 발발했고 삶은 다시 요동쳤다. 9·28 수복을 전후로 하여 이념을 따라 월북했고 한국에서 그의 작품은 한동안 공개와 언급이 금지당했다.

배운성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1988년 납북·월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다. 2000년대에 한 한국인 컬렉터가 파리에 남겨진 그의 그림을 다수 수집하며 실물도 볼 수 있게 됐다.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배운성 개인전을 마련했는데 기획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배운성’전은 역시 한국 근대 미술의 역사를 복원하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기획된 전시이다. 더욱이 이 전시는 배운성이라는 작가의 재조명을 통해 우리 근대 미술의 분절된 단면을 이어보려는 노력을 보여주고자 한다.”
웅갤러리에서는 2020년 미술관이 아닌 갤러리로는 처음 배운성의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출품작인 이 작업도 ‘가족도’와 마찬가지로 한국적 장면을 서구 재료인 유채 물감을 통해 그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줄다리기(1930년대)’. 웅갤러리 제공
‘가족도’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국내 관객에게 선보여진 작가의 대표작이다. 가로 길이 2m에 이르는 대형 화면이 사람들로 가득 찬 작품이다. 등장 인물은 할머니부터 돌쟁이 아기까지 연배가 다양한데 3대 이상 됨 직하게 보이는 대가족의 모습이다. 총 17명에 달하는 가족은 한옥의 마당부터 대청마루까지 옹기종기 앉거나 서 있다. 화면 가운데 화려한 의자에 앉아 돌쟁이 아기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다. 우측에 녹색 저고리를 입은 남자아이가 엄마를 바라보며 들어가자고 조르는 모습에서 생동감이 전해진다. 한옥의 커다란 규모는 저 멀리 장독대가 놓인 뒷마당까지의 거리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은 백인기의 가족으로 알려졌다. 그림 가장 왼편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이를 배운성으로 본다. 다수 자화상에 등장했던 작가의 얼굴과 닮았기 때문이다. 작품은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다양한 한복과 소품에서 당시 옷차림과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미술사에 흔치 않은 대가족 초상화라는 이유도 있는데 이처럼 전쟁 전에 그려진 가족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중섭, 장욱진 등이 가족을 주제 또는 소재 삼아 다수의 작품을 남겼지만 모두 전쟁 이후다. 즉, 긴 유럽 생활을 통해 얻은 서구적 가족 초상 개념을 적용해 일찍이 그려낸 그림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