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낭비"vs"외교 관례".. 영부인 해외 순방 '어디까지 가봤니'
"외교 관례" 원칙론 vs "혈세 낭비" 회의론
영부인은 공인, 국민 정서·눈높이 감안해야
"부디 그냥 가는 건 아니셨으면 좋겠다. 외교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하고, 꽤나 많은 예산이 소모된다. 왜 꼭 같이 가야 되나."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해외 순방에서 배우자가 같이 동반해서 해야 되는 역할들이 있다. 대통령 배우자역할에 대해 근본적 상황을 무시하지 말았으면 한다." (김병민 국민의힘 비대위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달 18일부터 5박 7일 일정으로 출국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미국 캐나다 순방에 김건희 여사의 동행을 놓고 정치권에선 일찌감치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국외 행사에 대통령 배우자가 동행하는 것은 통상의 외교 관례라는 '원칙론'과 특별한 목적과 일정이 없다면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론'이 맞붙은 것.
윤 대통령은 이번 순방 기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과 유엔 총회 참석,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의 정상회담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영부인 굳이 왜 따라가나"... '김건희 리스크'도 우려
김 여사의 해외 순방 '자제령'을 촉구하는 쪽에선, 이번 순방 목적과 성격을 따져 봤을 때 굳이 김 여사의 동행이 필요 없지 않느냐는 점을 우선 지적한다.
대통령실은 당초 김 여사가 5박 7일 순방 기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 조문 사절로 참석하는 것 외에 별다른 일정이 없다고 밝혔었다. 그러자 "구태여 대통령 부부가 갈 필요가 있나. 차라리 총리께서 가는 게 낫지 않는가"(새누리당 비대위원 출신 이상돈 전 의원)라며 부부동반 조문 일정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느슨한 순방' 일정이 '순방 동행 회의론'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그러자 대통령실은 공식 브리핑 이후 2시간 반 만에 김 여사의 일정을 추가로 공지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 일정 참석 이외에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초청 리셉션과 동포 간담회 등 부부 동반 외교 일정을 부랴부랴 추가하며 진화에 나선 것이다.
'김건희 리스크'도 우려를 키우는 대목이다. 김 여사는 첫 다자외교 데뷔 무대였던 지난 6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 당시 인사 비서관 아내 동행 논란, 고가의 목걸이 대여 의혹 등 여러 구설에 올랐다. 고민정 민주당 최고위원이 "김 여사에 대한 의혹들이 너무나 눈덩이처럼 불어 있는 상황이다. 외신과 그 나라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저 따뜻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꼬집은 배경이다.
태풍 힌남노 피해 복구 등 국내 상황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김 여사의 해외 나들이가 불필요하게 민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권 성향 정치평론가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태풍 힌남노 피해 복구로) 국민들이 많이 어려운 상황인데 대통령의 배우자까지 외교활동 가시는 게 적절할까. 차라리 영부인께서 포항에 가셔서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식사라든지 빨래라든지 이런 모습을 일주일 정도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면 국민이 어느 정도 감동하지 않을까"라고 대통령실의 정무적 판단에 아쉬움을 표했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여러 가십들이 대통령 순방 성과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과도한 정치 공세"... '퍼스트레이디 외교' 구축 필요성도
이에 맞선 '원칙론'도 만만치 않다. 대통령 배우자 역시 '퍼스트레이디 외교'로 독자적인 대외 활동을 구축해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반박이다. 이번 순방 일정에 포함된 유엔 총회의 경우도 대통령의 배우자가 동행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야권 내부에서도 "대통령 해외 순방의 모든 관례에는 부인 동반이 원칙"(박지원 전 국정원장)이라며 '원칙론'에 힘을 보태는 목소리도 나온다. 진중권 전 교수는 "싫든 좋든 김 여사는 이 나라의 영부인으로,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 이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비판을 넘어 혐오로 보인다"며 김 여사의 순방 동행을 비판한 고민정 최고위원을 겨냥, "과도한 정치공세"라고 맞받기도 했다.
대통령 배우자는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대외 활동에 동행하는 파트너로 공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법적 권한이 부여된 자리는 아니다. 이에 한국의 역대 대통령 영부인들은 본인의 의지와 역량, 여러 정무적 판단에 따라 본인의 역할을 스스로 조절해왔다. (▶"이쯤되면 러닝메이트..." 어떤 퍼스트레이디를 원하시나요)
"영부인은 공인"... 미국도 해외 순방 '세금 값' 따져본다
대통령 배우자의 해외 순방 관련해선 명확한 규정과 지침이 부재한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여야가 공수(攻守)를 바꿔 치고받는 소모적 정쟁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게 현실이다.
당장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엔 부인 김정숙 여사의 해외 순방 동행을 두고도 여러 뒷말이 나왔다. 당시 야권이었던 국민의힘에서는 김 여사의 순방 일정 중 관광지가 유독 많다며 "국민 혈세로 부부동반 세계일주하냐", "김정숙 여사의 버킷리스트"라며 한바탕 비판을 쏟아낸 바 있다.
영부인 해외 순방이 논란이 되는 건 한국만의 얘기도 아니다. 퍼스트레이디의 공적 역할을 인정하고, 법적 지원 기반을 갖춰 놓은 미국에서도 영부인 해외 순방에 예민한 편이다. 영부인들이 해외 순방을 떠날 때마다 그 일정을 추적해 '세금 값'을 하는지 따져보는 납세자 단체가 있을 정도다. 대통령 배우자는 엄연한 공인(公人)으로, 국민적 눈높이에서 깐깐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대신 친선 대사 역할 톡톡... 외교적 성과 낼 수도
대통령 배우자가 단독 해외 순방으로 '퍼스트레이디 외교' 역량을 드높인 성공 사례도 적지 않다. 한국에선 영부인 최초로 단독 해외 순방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를 꼽을 수 있다. 이 여사는 지난 2002년 5월 뉴욕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해 기조연설까지 했다. 대통령 배우자가 남편을 대신해 직접 외교 무대 전면에 나서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의 대통령 배우자들 역시 대통령을 동반하지 않은 대외 활동으로 고유의 퍼스트레이디 외교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통령이 일정상 방문하지 못하는 행사를 대신 찾거나, 일종의 '영부인 사업'과 연관된 일이라면 단독 순방에도 적극 나서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힐러리 클린턴, 미셸 오바마 여사는 퍼스트레이디 시절 세계 전역을 누비는 '나 홀로 순방'으로 대통령 못지않은 영향력을 과시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도 독자적 대외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지난해 7월 도쿄올림픽 개회식에 단독으로 참석하고, 지난 5월에는 루마니아 등 동유럽 방문 일정을 소화하며 러시아 침공으로 피란 온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로했다.
"깐깐해진 국민 눈높이 맞춰 목적·일정·메시지 잘 관리해야"
특히 바이든 여사는 예고 없이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을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부인 올레나 젤렌스카 여사와 전격 회동, 전 세계에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양국의 대통령보다 먼저 이뤄진 것으로, '퍼스트레이디 외교'의 본보기가 됐다는 평가마저 나왔다.
'마땅히 가야 할 곳인가. 전할 메시지가 있는가.' 대통령 배우자가 해외 순방을 떠날지 말지, 고민될 때 따져봐야 할 최소한의 기준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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