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 전쟁, 왜 인간은 이성의 극점에서 이성에 반하는 일을 할까?
[김창훈 칼럼니스트 ]
러시아-우크라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여섯 달을 넘어서고 있다. 10여만 명의 군인 사상자와 함께 약 1000만 명에 가까운 피난민이 발생했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인류의 화성 이주를 이야기하는 시대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괴이하다. 우리 인간의 이성이 극점에 도달한 지금 다시 이성과 반하는 일을 우리는 하고 있다. 우리 인류는 진보한 사회에 사는 것일까? 아니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왜 이토록 수천년 전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일까? 발전은 발전이되 오롯한 발전이 아닌, 진보는 진보이되 오롯한 진보는 아닌 이상야릇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 철학자들이 있다. 이차세계대전을 경험한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그들이다. 이들은 전쟁이 막 끝난 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답하기 위해 함께 책을 썼다. <계몽의 변증법>(테오도어 아도르노·막스 호르크하이머 지음, 김유동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이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생각하면서 이 문장이 떠 올랐다. 책을 펼쳤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유대인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연구소'의 핵심 멤버였다.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와는 거리를 두었지만 그래도 좌파적 색채를 띤 연구소였기에 나치의 탄압이 시작된다. 연구원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고 저자 두 사람은 미국으로 도피하여 책을 내게 된다. 이들은 현대문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몽이 전면화된 시기에 인종청소와 대규모전쟁이라는 반계몽도 전면화되는 이율배반적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경제와 평화의 선순환시대 벨에포크(Belle Époque)는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산산이 부서졌다. 일차대전의 참화에서 인류는 무엇인가를 배웠어야 했다. 2차 대전은 1차 대전의 몇 배의 피해를 발생시켰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왜 인류는 고대인, 중세인과 다르게 계몽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왜 이다지도 몽매한가? 이런 화두가 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간이 아직 덜 계몽되어서일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오히려 계몽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상찬해 마지않는 계몽에는 사람들이 살펴보지 못한 어두운 비밀이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의 야만은 계몽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계몽 자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두 사람이 말하는 계몽은 일반적인 의미의 계몽과는 다르다. 저자들은 근대의 계몽만이 계몽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계몽은 고대에서 출발하는 신화적 사고를 극복해가는 근대적 정신이다. 그런데 저자들은 계몽의 극복 대상이었던 고대의 신화도 원시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계몽'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 자체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계몽이 극복한 것이 신화적 사고였는데 그 신화가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니. 알 수가 없다. 무슨 이야기일까?
자연의 압도적 힘 앞에서 무기력했던 인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과 소통해야만 했다. 자연이 부과하는 두려움을 그대로 방치하고서는 집단을 유지해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원시제전을 창안해낸다. 원시제전의 목적은 자연 앞에서 자기보존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철학자 문병호는 책 <계몽의 변증법 읽기>(세창미디어 펴냄)에서 여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시제전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볼 때, 인간이 자연에 대해 최초로 접촉을 시도한 사태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조직적인 행사인 것이다." 원시제전에서 인간은 자연을 길들이고 소통하기 위해 희생물을 바쳤다. 이런 원시제전에서 이야기되던 이야기가 신화였다. 즉 신화는 자연을 길들이려는 상상적 바램이었다. 원시시대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인간은 그 모든 개체적 대상들과 교감을 나누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화학에 따르면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다. 무수히 많은 대상들을 정서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이후 신화가 등장한다. 신화는 개별 대상이 적은 수의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우리가 눈 앞에서 대응하는 개별 늑대 한 마리, 한 마리가 늑대 또는 맹수라는 개념으로 정리되듯 인간을 넘어서는 거대한 자연의 힘들은 개별성을 상실하고 바다의 신, 하늘의 신, 벼락의 신 등의 관념으로 정리되었다.
원시시대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이 취합되어 신화로 정착해 가는 과정에 신화들은 기록의 보고에서 출발하여 인간세에 대한 가르침으로 전환되었다. 나중에는 거대한 신들의 세계가 구축된다. 결국 신화적 세계관이 등장한다. 이제 신들은 특정 씨족과 초혼제(招魂祭)를 통해 교감하는 존재가 아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이제 더 이상 직접 '원초적인 힘'들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즉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이지 우리 마을 앞을 지키는 그래서 우리 씨족과 절대적 감응을 공유하는 특수한, 국소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바다 전체를 관장하는 보편적 의미의 신인 것이다. 우리 마을 앞바다의 특정한 신이 아니라 대양의 신 포세이돈이 되면 마을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는 가늘고 희박해진다. 즉 인간과 감응하는 세상의 사물 하나하나, 개체 하나하나의 영혼인 '마나'(폴리네시안 종교에서 모든 사물에 깃든 영혼 즉 정령을 의미-필자주)의 역할이 축소된다. 이런 신화는 원시제전을 통해 사람들 속에서 뿌리내린다.
태양 중심적인 가부장적 신화는 그래서 본래부터 또 다른 '계몽'이었다. 두 철학자의 "신화는 계몽이다"라는 주장은 이런 의미다. 애초에 계몽을 촉발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책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것, 낯선 것은 모두 원초적이고 분화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경험계를 초월하는 것이고, 사물의 이미 알려진 속성 외에 사물 속에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이 경우 원시인이 초자연적인 무엇으로 경험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과 대립되는 어떤 정신적인 실체가 아니라, 개개의 사물과 구별되는 '뒤엉킨 자연 전체'이다". 뒤엉킨 채 분명하지 않은 것은 인간에게 공포를 일으킨다. 인간은 이 공포감을 극복해야 한다. "자연을 가상과 본질, 영향과 힘으로 이원화하는 것은 인간의 '불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저자들은 설명한다. 벼락이 치면 벼락의 공포를 그저 감내하는 것만이 아니라 벼락의 신을 생각하고 이 신들이 왜 벼락을 내렸는지를 궁리하면서 공포감을 해소했다. 자연의 원초적 힘들이 신화가 되면서 인간은 내면에서 이런 힘들이 만들어내는 불안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철학연구자 김주용이 논문 ''계몽의 변증법'에 나타난 계몽의 아포리아에 관한 고찰'에 잘 정리한 문장을 소개한다. "신화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세계 전체를 완결적으로 설명해내는 통일된 체계라는 점에서 이미 이론의 원형이다. 이에 따라 신화는 세계를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연관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며, 이 점에서 세계를 동일하고 반복적인 원리에 따라 파악하는 원형적인 설명 체계이다." 인간은 세계를 해명하면서 자신의 불안을 줄여나간다. 불안은 인간의 근원적 숙명이다. 이 정신적 체계화가 이해하기 어렵다면 강박증 환자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손을 강박적으로 씻는다든지, 생활용품을 칼같이 정돈하는 행위는 내면의 불안감을 외부에 대한 통제를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단순한 행동을 통해서든 개념을 통한 외부 세계에 대한 정렬과 체계화를 통해서든 내면의 불안을 감소시키는 쪽을 향해 전력질주해 왔다. 과거에는 신화가, 근대에는 과학이 이 불안해소의 기능을 담당했다. 저자들이 말하는 계몽은 근대의 계몽만이 아니라 외적 대상이 촉발하는 내적 불안을 통제하는 정신적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시 사고를 극복하려던 신화도 계몽이었고 그 신화적 사고를 넘어서려던 근대적 계몽도 계몽이다.
계몽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대상과 사태를 보편화시키려는 욕망이다. 자본주의가 끝없는 팽창을 요구하듯 계몽도 보편화를 원한다. 보편화는 동일성원리에 집착한다. 'A는 A다'라는 동일성 원리가 존재해야지만 치밀한 보편화가 제대로 작동된다. A이지만 A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계몽은 혐오한다. 계몽의 동일성사유는 자연과 사회 가운데서 자신과는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이 제시하는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강제하는 지배원리가 된다. 이제 계몽은 자신 이외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오직 계몽 안에서만의 정합성만을 인정하는 내재성이 중요해진다. 저자들은 계몽을 이렇게 비판한다. "모든 사건을 '반복'이라고 설명하는 '내재성의 원리'는 신화적인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이 내세우는 원리지만 이 원리는 바로 신화 자신의 원리인 것이다" 내재성의 원리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사고 체계 내부에서만 찾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부터 계몽의 타락이 시작된다. 저자들의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는 명제는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해방의 원리였던 계몽이 그 자체의 보편화논리를 극단적으로 수행하면서 오히려 해방을 방해하는 반계몽적 신화가 된다. 이런 동일성에 대한 강박은 결국 반유대주의로 귀결되었다. 유럽문명 내부에 있지만 내부자가 아닌 즉 동일성의 원리를 파괴하는 존재가 유대인들이었다. 저자들은 반유대주의를 자본주의 축적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 사태라고 생각한다. 즉 근대의 반유대주의는 부르주아적 반유대주의인 것이다. 동일성에 대한 강박과 폭력적 자본주의가 맞물리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는 혐오를 넘어 이디오진크라지(과민한 거부반응, 은어로 말하자면 발작 버튼-필자주)가 되어버린다. 자본주의에 의해 피폐해진 대중들은 유대인을 향해 잘못된 투사를 감행했다. 저자들의 설명이다. "잘못된 투사는 자신의 것이면서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주체의 충동들을 객체의 탓으로 돌린다."
병적 투사를 감행하는 병든 주체들은 편집증 환자에 다름아니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책 <계몽의 변증법,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살림 펴냄)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편집증환자에게는 '초일관성'이 중요하다. 초일관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평가는 개입될 수 없다. 그래서 편집증에 빠진 사람은 논리와 체계의 악무한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논리와 체계 구축을 목표로 삼는 편집증은 계몽의 또 다른 측면이다." 논리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특히 내재적 논리로 파악이 되지 않는 외부 대상은 이해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노명우는 이어서 설명한다. "계몽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은폐하려 한다. 대상은폐는 계몽에게 사활적이다.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대상의 돌출은 자신의 정당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적 합리성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타자화한다. 타자화되지 않고 '거기'에 있는, 계몽적 합리성이 설명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계몽은 가장 비합리적인 반응을 보인다."
저자들이 염두에 둔 사회는 파시즘이 유린한 사회였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성장한계에 직면한 서구국가들이 찾아 나선 출구였다. 이런 파시즘은 기술과 우생학 등의 근대과학을 맹목적으로 숭배했다. 이성은 파시즘에서 '도구적 이성'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근대계몽의 동일성원리를 추종해 반유대주의의 광풍을 일으켰다. 이제 파시즘이 사라졌고 서구가 자유민주주의의 충실한 신도가 되었기에 <계몽의 변증법>이 전하는 이성과 계몽의 잠재적 '광기'에 대한 교훈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신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압도적 힘으로 균질화된 서구는 내부에서 동일성의 원리를 구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어디에서 찾을까? 외부 특히 앵글로색슨의 세계패권에 위협요소가 되는 특정 국가를 향해 '동일성원리'를 투사한다. 앞서 노명우의 글 "계몽적 합리성이 설명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계몽은 가장 비합리적인 반응을 보인다"를 생각해보자.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민주주의'를 계몽의 내재적 합리성으로는 해석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서구 국가들은 이들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투사한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절대로 민주주의일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올리가르히를 억제하는데 효율적인 푸틴의 권위적 통치방식은 그저 추악한 '독재'가 된다. 영국 황색언론이 만들어내는 반러시아, 반푸틴선전은 곳곳에 퍼진다. 반중국캠페인에는 BBC까지 가담했다. 직업훈련소가 갑자기 수십만이 감금된 노동캠프가 되어버린다. 북한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만든 핵무기의 최종 목표가 미국과의 국교수교와 평화협정체결이었음에도 이 사실을 지적하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 러시아, 중국이 한국과 수교했듯 미국이 북한을 인정했다면 북핵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도 않을 문제였다.
저명한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1980년 이후 무려 15차례 이상 해외에서 불필요한 전쟁을(wars of choice : 아프간, 이라크, 리비아, 세르비아, 시리아, 예멘 등) 벌인 국가인 반면, 중국은 한 번도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러시아는 단 한 차례 해외 전쟁을(시리아) 벌였을 뿐이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8월 22일 자 '서방의 '러시아·중국 악마화'가 세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러시아가 수행한 단 한번의 전쟁인 시리아전쟁 참전의 목적도 특정 국가가 지원한 극단적 이슬람무장세력에 의한 시리아합법정부 전복을 막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중국, 러시아, 북한을 조롱하고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글들로 넘친다. 클리앙같은 나름 진보적인 커뮤니티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왜 이럴까? 버니 샌더스의 아이들로 추앙받던 민주당 의원들을 포함해 미국 민주당의 진보블록조차 네오콘적 세계관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다. 미국 국내에 국한하면 지극히 진보적인 사람들이 국내를 벗어나면 지극히 편협해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전에는 내부에 투사되던 동일성원리가 이제는 외부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몽의 세례를 더 많이 받은 주체들이 동일성원리에 벗어나는 존재들에 대해 더 강한 공격성을 보인다. 계몽은 계몽 그 자체에 이미 '광기'를 품고 있다. 계몽이 편협한 공격성으로 전환되는 이 지점에서 '계몽의 역설'이 발생한다. 저자들이 말하는 '계몽의 역설'은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계몽이라는 야만을 벗어날 수 있을까? 책 전체에는 저자들의 비관주의가 짙게 투영되어 있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상은 너무나 치밀해서 그것을 꿰뚫어본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는 환각으로 여겨진다." 계몽이 만들어낸 야만은 치밀한 논리와 선의지로 무장해 있기에 반박하기가 더욱 힘들다. 나쁜 놈의 어설픈 논리가 아닌 것이다.
타자도 나와 같아야 한다는 강박적 동일성원리, 그리고 "나와 같다"는 판단의 기준 역시 나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내재성의 원리가 동원되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계몽의 변증법>은 다시금 지식인의 독서 목록 최상단에 있어야만 할 것이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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