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서 예술활동 해보니.."예술은 참을 수 없는 재채기"
2015년 노르웨이 베르겐대학 진학
"동양적 요소 가득" 평가
"그림은 가장 훌륭한 언어, 누구나 예술가 될 수 있어"
"캄보디아 소녀가 보내준 꽃 한 송이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어요."
사공누리(38)씨는 노르웨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다. 2014년 미술을 공부하려고 노르웨이에 왔다가 남편을 만나 정착했다. 지금은 '노르웨이의 사우디'로 통하는 스타방에르에서 예술가이자 로갈란드(rogaland) 주립미술관의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다. 노르웨이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예술을 펼치는 작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8월에 한국에서 연 개인전에서도 붓글씨를 연상시키는 그림과 삼베천을 활용한 설치 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노르웨이는 연중 300일 이상 비가 내리고 여름은 2주밖에 안 될 만큼 척박한 자연환경이지만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한국이든 노르웨이든, 세계 어디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예술의 힘을 믿고, 그 힘에 의지해 예술가로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고 고백했다.
캄보디아 소녀의 편지 한 통이 전한 감동
노르웨이는 펜팔을 통해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외국인 친구 사귀기 프로그램에 참여해 노르웨이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떠나 펜팔 친구를 직접 만났다. 노르웨이에 대해 '한번쯤 더 오고 싶은 곳'이라는 인상은 받았지만, 삶의 뿌리를 옮겨심을 곳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연한 꿈을 안고 노르웨이를 다시 찾게 해준 것은 3년 동안 소액 후원을 하고 있던 캄보디아 소녀가 보낸 감사 편지 한 통 덕분이었다. 2014년 석사 논문을 완성한 후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고 있을 즈음에 받은 편지였다.
"편지에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어요. 단지 꽃 세 송이가 그려져 있더군요. 그림을 보면서 멍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림 하나가 그 어떤 말과 글보다 순수하고 강렬한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림으로 아이들을 돕고 싶어졌다.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칠 꿈을 품었다. 어릴 때부터 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캄보디아 소녀를 소개받았다. 그 소녀로부터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꿈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얻은 셈이었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죠.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즉시 노르웨이가 떠오르더군요. 거기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자 싶었죠."
'한국적인 것'을 모두 비워내려는 몸부림
2014년 노르웨이로 건너가 2015년에 노르웨이 베르겐대학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비워내려고 노력했다. 사막에서 금식하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선지자처럼 소녀의 계시를 따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배웠던 서예, 학부 시절 부전공으로 선택한 미술과 대학원에서 전공한 동양철학까지 모두 비워내려고 손가락을 내면 깊숙한 곳까지 찔러넣어 마음의 울대를 자극했다. 토해내고 또 토해냈다. 영혼이 거울처럼 맑아질 때까지.
"너의 작품은 동양적이고, 조용하며, 깔끔하고 여성스럽다. (Your work is asian, silent and feminin)"
대학원 졸업전시회에서 작품 심사원에게 들었던 평가였다. 동양적이다, 여성스럽다는 말은 금기어에 가까웠지만 그는 "이 단어들 이외에는 네 작품을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노르웨이와 한국은 닮은 점이 많았다.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태도가 그랬다. 한국의 옛집은 창문이 크다. 창문을 통해 자연의 풍광을 방안으로 들이는 구조였다. 노르웨이인들도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한국이 여백의 미를 추구했다면, 노르웨이는 삶 자체를 여백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고요한 자연에 스며드는 삶을 추구한다. 이를테면 한국인이 보기에는 '시골'로 느껴지는 곳에 살면서 주말마다 "사람에 치여서 힘들다"면서 깊은 산속 별장으로 주말을 즐기러 가는 식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감지하는 더듬이가 하나쯤 있나 싶을 정도로 예리하고 예민한 감성을 지닌 노르웨이인들이다. 예를 들자면, 냄새만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도 있다. 냄새가 불러오는 기억, 추억, 감성을 그들의 예술 테마인 것이다. 고요한 자연이 선물한 예술적 감성인 셈이다.
수식어 없이 원론적인 것들만 놓고 이야기하면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곳이 노르웨이였다. 결론은 '유럽과 아시아의 것이 접목된 것을 하자'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아온 세월은 이미 그의 피와 살, 심장을 둘러싼 두터운 근육이 되어 있었으니까.
미소에서 얻은 위안 '너의 웃음이 나를 안을 때'
차이점도 있었다. 우리는 한과 흥, 여백과 흘러넘침이 공존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데 비해 노르웨이는 그윽하고 묵묵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자연 환경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해를 보기가 힘들었다. 365일 중 300일 가까이 비나 눈이 내렸다. 한국인이 느끼기에 여름은 일 년에 2주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폭염도 고작 28도였다. 사시사철이 고속열차처럼 흘러가는 한국과 달리 노르웨이는 어둑한 하늘과 지겹도록 내리는 비와 안개가 정물화처럼 표구가 된 듯했다. 우울감이 그를 괴롭혔다. 노르웨이에서 생활한 8년 중 5년 동안이나 축 늘어진 마음을 질질 끌고 다니며 출근을 하고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잠을 자는 기분이었다.
노르웨이의 자연이 그를 축 처지게 했다면, 그에게 생기를 찾아준 것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문득 사람들의 미소와 웃음소리가 가슴을 두드렸다. 웃음소리가 길고 넓은 파장으로 그에게 다가와 그를 깊이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웃음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만들었다.
'너의 웃음이 나를 안을 때'
지난 8월 대구에서 열었던 전시회 타이틀이었다. 그를 안았던 미소를 작품으로 승화시켜 대중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주제는 마음속에서, 소재는 현지에서 조달한다. 웃을 때 생기는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천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구했다.
노르웨이인 남편에게 선물한 '꽃'은 '한국 야구장'
캄보디아 소녀의 편지를 받고 노르웨이행을 결정한 지 벌써 8년, 그 사이 새로운 지식과 체험을 쌓았고 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소녀가 보내준 '꽃 한 송이'를 마음에 담고 있다. 그 꽃 한 송이가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끄는 평생의 화두가 될 것만 같다.
"지식과 경험이 없어도 그림으로는 소통할 수 있어요. 그 캄보디아 소녀처럼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또 꽃을 그려 마음을 전할 수 있어요. 그걸 아이들에게 특히 제3국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어요."
그는 "우리 모두가 예술가"라고 했다.
"뭔가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에요. 멀리 있지도 화려한 기교가 필요하지도 않아요. 참을 수 없는 재채기 같은 거예요. 마음을 간질이는 햇살을 재채기하듯 토해내면 그게 예술이 되는 거지요. 초등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면 곧잘 재채기를 해요.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어요."
작가는 한국에 올 때마다 남편을 위해 색다른 예술활동을 펼친다. 야구장 방문이 그것이었다. 이번에도 '너의 웃음이 나를 안을 때' 전시회가 끝난 후 남편과 대구라이온스파크를 찾았다. 남편은 노르웨이에서는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는 흥을 야구장에서 경험한 뒤로 한국 야구 마니아가 됐다. 작가에게는 미소와 웃음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예술적인' 공간이다.
"한국 야구장은 제가 남편에게 선물한 가장 큰 야생화예요. 야구장 자체가 예술인 거지요. 우리 삶 어디든 예술의 소재가 있고, 그 소재를 예술적인 기법에 담아내면 훌륭한 소통의 도구 혹은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되는 거지요."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최은규 대구한국일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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