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역사 왜곡' 중국 전시회가 남긴 것
고구려와 발해를 삭제한 한국사 연표를 게시해 역사 왜곡 논란을 자초한 중국 국가박물관이 문제의 연표를 철거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항의 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역사 연표도 함께 치웠습니다. 논란은 봉합 국면을 맞는 분위기입니다.
■ 중국 국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항의 뒤 '고구려·발해 삭제' 연표 철거
해당 전시회는 한중일 세나라 국가박물관이 함께 준비한 청동기 유물 특별전이었습니다. 중국 베이징의 심장부, 천안문 광장 옆에 자리한 국가박물관에서 7월 26일부터 10월 9일까지 한중일 청동기 유물 50점을 전시합니다. 중국 측은 홈페이지 등을 통해 한중 수교 30주년, 중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한다는 의미도 부여했습니다.
전시회 역사 연표에 문제가 있다는 첫 보도가 나간 것이 9월 13일, 그리고 연표 철거가 이뤄진 것이 이틀 뒤인 15일인 만큼 비교적 서둘러 조치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사이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은 '중국 측에 연표 수정 요구', '수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전시품 철거', '중국 측이 연표 철거 방침 전달' 등 세차례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중국 외교부가 두차례, 한국 외교부도 한차례 정례 브리핑을 통해 입장을 밝히며 양국간 현안으로도 부상했습니다.
이번 사안은 중국 측의 잘못이 분명합니다. 고구려와 발해가 빠진 한국사 연표를 게시한 것도 물론 문제지만, 해당 연표 아래에 '한국국립중앙박물관이 제공한 내용'이라고 버젓이 설명을 달아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분명히 고구려와 발해가 포함된 자료를 제공했다며 관련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 측의 행위는 제공 자료를 성실히 전시에 반영하는 국제 관례와 그동안의 신뢰 관계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중국 측이 임의 편집, 즉 왜곡을 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중국 측은 연표를 수정하는 대신 연표를 철거하는 우회로를 택했습니다. 한국 측은 미흡하나마 요구한 취지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판단한다며 전시회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 2004년 '동북공정' 논란 속 한중 구두 양해...이번 논란 봉합 과정과 유사
이같은 결과는 2004년 동북공정 논란으로 한중 관계가 악화됐을 당시 양국 정부간 구두 합의를 통해 문제를 봉합했던 때와 유사합니다. 양국 정부는 당시 고구려사가 현안으로 대두한 점을 중국 측이 유념하고, 역사 문제에 따른 양국 우호 협력 관계 손상을 방지하며, 고구려사가 정치 쟁점화하는 것을 막는다는 내용 등 5개항에 합의했습니다.
당시 한국 측 입장이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중국 측은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내용을 복원하는 일만은 끝끝내 거부했습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 한국 역사 소개란에 삼국의 역사 가운데 고구려 부분을 삭제해 논란을 빚었습니다. 정치 갈등으로 확산되기 전에 문제를 봉합하되 고구려가 한국 역사란 점을 명백히 인정하지는 않는다, 이번 중국 국가박물관 논란의 마무리와 유사합니다.
중국 고위급 인사의 방한 국면이란 측면도 비슷합니다. 2004년 당시 임명된지 이틀 밖에 안된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급거 서울을 찾아 문제를 봉합했습니다. 이는 당시 자칭린 중국 정협 주석의 방한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논란도 중국 권력 서열 3위 리잔수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방한 기간 불거졌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진표 국회의장을 만나기로 예정된 상황이었습니다. 60여 명 대규모 수행단을 이끌고 온 리잔수 위원장의 방한이 자칫 양국 역사 문제에 가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중국 믿었다 고개 숙인 국립중앙박물관...주중 한국문화원 등과 사전 소통 등 미흡
이번 논란 과정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입장문을 냈습니다. 중국 측의 연표 왜곡을 전시 시작 50일이 지난 뒤 언론 보도를 통해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코로나19 시국이긴 합니다. 특히 중국은 해외 입국시 여전히 10일의 격리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중국 출장과 상황 파악이 어려웠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전시 유물의 수준 등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전시 시작 전 꼼꼼히 현장을 살폈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전시회 전 베이징에 있는 한국 문화원이나 주중 한국대사관에 파견된 문화부 관계자와의 소통도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시회가 시작됐을 때도 이들은 전시 자체를 몰랐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박물관 관계자들이 직접 오기 어렵다면, 사전에 현장을 점검해달라며 협조를 구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아쉬움이 큽니다. 별도 기관이라 연락하지 않았다지만 같은 문화부 유관기관 또는 관계자들이고, 무엇보다 '한중 수교 30주년'과 '한중 문화교류의 해'를 맞아 양국 공동 행사에 대한 관심도 높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KBS와의 통화에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연신 자세를 낮췄습니다. 국가박물관 사이 오랜 신뢰 관계가 있어서 중국 측이 이럴 줄 몰랐다고 털어놨습니다. 올해로 12회째인 한중일 국립박물관장 회의의 부속 행사로 이번 전시회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동안 관례에 따라 상대를 믿고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측이 특정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지만, 이번 연표 왜곡이 단순한 한차례 해프닝인지 아니면 중국 내 일련의 흐름 때문인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시진핑 정부 들어 역사 정책과 자국 중심 역사 서술 강화"
이와 관련해 김현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연표는 국가와 역사의 계통성은 물론 정통성과 관계있는 만큼 중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이 예전에는 적어도 압록강 이남 한반도에 대한 삼국의 역사는 인정하는 역사 서술 태도를 보였는데 최근 들어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우려했습니다. 특히 시진핑 정부 들어 역사 정책과 중국 중심의 역사 서술을 강화하면서 과거와 논의를 달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중화민족의 부흥'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습니다.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모두 '중화 민족'이라는 틀에 묶는 것입니다. 고구려에 대한 역사 인식도 이같은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정재호 주중 한국대사는 서울대 교수 시절 출간한 저서 『생존의 기로』에서 2004년 한중 양국 정부의 역사 관련 구두 합의를 평가한 바 있습니다. 협상을 통해 더 큰 갈등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은 만큼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면서도 한국 정부의 조급성이 드러났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한민족의 역사적 정체성과 연관된 문제를 형식이나 내용에서 적잖이 가볍게 다뤘다는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칭린 정협 주석의 방한을 앞두고 중국이 문제의 조기 해결을 위해 고위급을 파견한 상황이고, 문제를 초래한 것이 중국인데도 한국은 구속력 없는 구두 합의에 조급히 동의했다면서, 재발 방지를 치열하게 요구할 수 없었는지 아쉬움이 크다고 덧붙였습니다.
■ 정부·언론이 돌아볼 바는?
이번 중국 국가박물관 전시 논란을 봉합하는 과정은 이같은 2004년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국 측이 당초 요구한 수정과 사과 대신 중국 측은 철거를 선택했습니다. 한국 측은 사실상 이를 수용했습니다. 중국 측이 한국 측 자료를 왜곡 전시한 분명한 잘못이 있는데도 한국 측은 연표 철거라는 미봉책을 바로 받아들였습니다.
리잔수 위원장이 방한 중이어서 중국 정부가 조급함을 느낄 수 있는 상황도 자칭린 방한을 앞뒀던 2004년과 비슷합니다. 시기적으로나 사실 관계 측면에서 한국 쪽에 분명한 우위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사 문제의 정치 쟁점화를 방지한다는 2004년 합의에 기초했을 지는 몰라도 한국 외교부 부대변인도 공개적으로 지적한 민족 정체성 측면에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언론도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이번 사안은 물론 언론 보도로 알려지고 의제화됐습니다. 하지만 전시 시작 50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주중 한국대사관이나 한국문화원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사전에 전시회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전시회 시작 무렵부터 한동안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타이완 방문이라는 태풍에 휩쓸렸으며, 그 뒤로도 한중 수교 30주년(8월 24일) 관련 행사 취재와 기획 뉴스 준비로 바빴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좀 더 부지런히 한중 현안을 챙겼어야 한다는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 중국 국가박물관에서 한국 특파원들 헛걸음·취재 제한도
더불어 박물관 취재 과정의 이야기도 남길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박물관에서 한중일 청동기 전시회 문제를 취재하던 일부 한국 특파원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촬영한 영상을 삭제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논란이 불거진 뒤 하루 전 예약을 했는데도 박물관에 들어가려다 제지를 받고 헛걸음을 한 특파원도 있습니다. 박물관 입장시 외국인은 여권을 제시해야 하는데 특파원들의 여권에는 기자 신분이 명시된 비자가 붙어있습니다. 예외 없이 신원이 드러납니다.
국가 박물관 내 다른 전시관들에 비해 한중일 청동기 전시회, 특히 한국 전시관은 보안 요원들이 관람객들의 행동을 유독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언론에 대한 중국의 태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사실 한중일 청동기 전시회 현장에서 연표와 별개로 눈길을 확 사로잡은 것이 있습니다. 한국 전시장 입구에 자리잡은 천흥사명 청동 범종(天興寺銘 靑銅 梵鍾)입니다. 고려 시대의 걸작, 국보 280호입니다. 세밀한 부조와 기품있는 모양새에 눈을 쉽게 뗄 수 없었습니다. 군계일학이란 말로는 부족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명작의 도도한 아우라 앞에 역사 왜곡 같은 홍진의 세태가 그 순간만큼은 덧없이 느껴졌습니다.
조성원 기자 (sungwonc@kbs.co.kr)
Copyright © K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이용(AI 학습 포함) 금지
- ‘몸집 불린 난마돌’ 북상…제주·영남 해안 영향권
- 미 “확장 억제 강화, 핵 포함 모든 방어수단 가동”
- 300여 회 스토킹에도 ‘불구속’…보복 범죄 기회 줬다
- [단독] ‘피해자 보호’ 요청했어도 범행 못 막았다
- [영상] 미니멀리즘과 90년대 복고가 온다
- ‘나홀로 순찰’ 지하철 역무원…CCTV로 본 아찔 순간들
- ‘靑 공원·관광상품화’에 467억원…尹 “영빈관 신축 전면 철회”
- 태풍 침수 차량 9대 잇따라 화재…“시동전 점검을”
-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서울시의원 ‘실언’ 논란
- ‘오징어 게임’ 주역들 “제도적 육성보다 창작 기회·자유 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