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 한국 근대미술의 태동

노형석 2022. 9. 1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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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라크마 미술관서 '사이의 공간' 특별전]
이쾌대 '군상 IV'·이인성 '경주의 산곡\' 등
1897~1965년 격동기에 탄생한 명작들
미 LA 최대 미술관서 대대적으로 소개

파노라마적 연결로 미술사 흐름 실감
국내 관행 깨고 사진작품 과감히 배치
'신여성의 등장\' 등 시대상 담아 차별화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전의 핵심작품이자 관객의 시선을 이끄는 축 구실을 하는 이쾌대의 대작 <군상 Ⅳ>(1948). 노형석 기자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과 배우 이정재가 미국 제74회 에미상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 수상의 낭보를 전한 지난 12일(이하 현지시각), 시상식이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현지 예술애호가들과 교민들은 시내 또 다른 곳에서 한국 문화의 색다른 진면목을 엿보고 있었다.

에미상 행사가 열린 도심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서쪽으로 꽤 떨어진 윌셔대로 5905번지에 자리 잡은 미 서부 최대의 명문 미술관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라크마). 여기서 시상식 하루 전인 11일부터 격동기인 1897~1965년의 한국 근대미술 명작들을 사상 처음 미국 현지에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특별전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내년 2월19일까지)가 열렸다.

전후 한국사회의 복구와 재생의 의지를 암묵적으로 상징하는 최만린 조각가의 반구상 조각 <이브>(1965)로 시작하는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전 들머리 풍경. 노형석 기자

앞서 지난 8일 언론에 공개한 전시 현장은 이탈리아 건축 거장 렌조 피아노가 2010년 설계한 레스닉 파빌리온 안에 있었다. 들머리부터 여느 국내 근대 미술전과 달랐다. 온통 벌건 진홍빛 패널 벽면이 들머리에 들어서 있었다. 벽면에는 ‘사이의 공간’과 이를 뜻하는 영어단어 ‘비트윈’(Between)이 인쇄되어 있고, 그 앞에 작고한 조각가 최만린이 강렬한 생명의 의지를 표상하며 만든 날카로운 입면의 반구상 조형물 <이브>(1965)를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벽면을 지나 입구에 들어서자, 높이 10m는 족히 넘을 높은 층고에 743㎡(8000평방피트)나 된다는 드넓은 전시장이 갑자기 펼쳐졌다. 먼저 눈에 감겨 들어온 것은 맞은편 벽면에 붙은 월북작가 이쾌대가 해방 이후 그린 저 유명한 대작 <군상 Ⅳ>(1948)였다. 뒤이어 저 멀리 안쪽 벽에 박래현의 <노점>(1956)이 걸려 있었다. 더 안쪽 전시실에 친일 작가 윤효중이 1942년 일제의 전쟁 정책에 부역하며 만든 여인상 <현명>이 보였다. 전시장 한가운데로 들어갔더니 들머리 패널 벽 바로 뒤쪽에 한국전쟁 때 오발사고로 피살된 비운의 천재 화가 이인성의 30년대 대표작 <경주의 산곡>(1934)이 걸려, 대구 초등학교 동창 이쾌대의 대작 <군상>과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쾌대의 대작이 걸린 바로 옆 벽에는 월북작가 배운성의 걸작 <가족>(1930~35)이, 이인성의 그림 바로 옆엔 한국 최초의 양화가로 꼽히는 김관호가 1916년 그린 한국 미술사 최초의 누드그림 <해질녘>이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이쾌대의 <군상>을 중심축으로 한눈에 명작들이 입체적인 연결구도로 절묘하게 배치되면서 한국 미술을 잘 모르는 관객이라도 한국 근대미술사의 흐름을 파노라마처럼 실감할 수 있게 한 구도로 짜여져 있었다. 이런 절묘한 큐레이션이 먼저 관객의 시각을 잡아끄는 것이다.

라크마 전시장에 내걸린 박대성 작 <우공투양도>(2014). 노형석 기자
라크마 레스닉 파빌리온 내부의 ‘사이의 공간’ 전시현장. 이 전시의 시선 축을 이끄는 핵심 작품인 이쾌대의 <군상 Ⅳ>(1948)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사이의 공간’전은 라크마와 한국기업 현대자동차가 2015년부터 협력사업으로 추진해온 ‘더 현대 프로젝트: 한국 미술사 연구’의 하나다. 라크마와 전시를 공동 주최한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존 소장품 41점과 이건희 기증컬렉션 21점을 냈고, 삼성미술관 리움과 개인들의 소장품 등도 더해 화가, 조각가, 사진가 88명의 작품 130여점을 가져왔다. 이 땅의 근대기 작품들을 서구권 미술관에서 재조명하는 최초의 기획인 만큼 접근법도 다르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래 1910년 한일병합과 일제강점기, 1945년 해방, 1950년 한국전쟁, 전후 시기까지 유례 없는 수난과 격동의 시간들을 겪었던 한반도 사람들의 내면적 심리와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지를 명작들을 통해 살펴보는 틀거지를 취했다. 서구의 문명 사조 앞에서 새롭게 적응하며 한국 특유의 근대적 가치를 세워나갔던 모색기로 바라본 것이다.

라크마 레스닉 파빌리온에 펼쳐진 ‘사이의 공간’ 전시 현장의 일부분. ‘신여성의 출현’ 섹션으로 윤효중의 여인상 <현명>(1942)과 실험실과 피아노 방의 여인들을 각각 담은 이유태의 두 대작 <탐구>(1944)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지난 8일 열린 언론 설명회 때 큐레이터 버지니아 문이 취재진 앞에서 전시장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전시는 이런 복잡다단한 역사적 흐름 속에 다양한 장르와 양식이 뒤섞인 한국 근대기 미술품들을 국내 전시장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낯설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들어서자마자 작품들을 한눈에 일별할 수 있는 파노라마적 구도가 단적인 사례인데, 국내 어떤 전시에서도 보지 못했던 조망이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건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층고 높은 공간에 검남색, 빨간색, 어두운 보랏빛을 띤 별도의 전시실 상자 구조물 4개를 내려 앉혀 5개의 소주제 영역별로 전시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소주제 방은 시기별로 ‘근대와의 조우’ ‘근대적 반응’ ‘모던의 모멘텀’ ‘신여성의 등장’ ‘현대로의 발전’이란 제목을 지닌 5개 소주제에 따라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기, 전쟁기, 전후 시기의 한국 근대미술의 주요 작품들을 망라하면서 회화와 사진, 조각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졌다. 수난과 격동으로 갈음되는 20세기 초·중반기 한국 근대미술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한 셈이다. 시각적 흥미를 유발할 뿐 아니라, 벽에 걸린 주요 대가들의 그림은 육중한 좌대에 올려진 권진규, 존배 등 조각 대가의 조형물과 시원한 동선으로 연결된다. 동시에 임응식, 임석제, 한영수 등 근대기 사진 선각자들의 사진작품들을 통해 당대의 시대상을 다큐적 이미지로 전하며 다른 소주제별 공간으로 이어지게 구성한 배려도 느껴졌다.

‘사이의 공간’의 대표작중 하나인 배운성 작 <가족>(1930~35). 노형석 기자
라크마를 찾은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왼쪽)과 기획자 버지니아 문(가운데), 마이클 고반(오른쪽) 라크마 관장. 노형석 기자
이쾌대의 <군상>이 먼저 관객의 시선을 맞는 ‘사이의 공간’ 전시장 모습. 안쪽으로 박래현의 대작 <노점>(1956)과 윤효중의 조각상 <현명>(1942)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재미동포 미술사학자로 2019년에도 라크마에서 한국서예전을 기획한 바 있는 큐레이터 버지니아 문 박사는 그림과 조각 명작들로만 뒤덮인 기존 국내 근대미술전의 관행을 깨고 사진작품들을 중요한 요소로 집어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여성’이란 별도의 항목을 통해 당대 근대 교육의 열풍 속에서 독립적 자아를 무기 삼아 외양을 바꾸어간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선별해 배치했다. 양복을 입은 화가와 흰 한복을 입은 신여성 모델을 대비시킨 장우성의 <화실>을 도록 표지로 각별하게 부각시킨 데서 보이듯 페미니즘 시각에서 고른 작품 구성은 기존 국내 전시들과 확고한 차별성을 얻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버지니아 문은 “한국의 기존 전시들과 다른 관점으로 낯설게 한국 근대미술의 새로운 시도들을 살펴보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현장을 둘러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도 “서구에 한국 근대미술을 대거 선보이는 기획도 처음이지만 근대미술 명작들을 이런 공간 구도 아래 한꺼번에 모은 시도 또한 유례가 없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사이의 공간’ 전의 마지막 부분인 5섹션 ‘현대로의 이행’에 나온 출품작들. 정면에 보이는 작품이 권진규가 만든 건칠상 <비구니>(1971)이고, 뒤쪽으로 이응노, 김정숙, 김종영이 만든 구상·반구상·추상 조각상들이 잇따라 보인다. 노형석 기자

앞서 지난 7월부터 이 전시장의 앞 건물 비캄 빌딩에서 시작한 한국화 대가 박대성 작가의 개인 초대전 또한 한국 전시와는 감흥의 결이 달랐다. ‘박대성: 고결한 먹과 현대적 붓’이란 제목이 붙은 그의 전시회장(12월11일까지)은 작가의 대표적 수작인 <불국설경>(1996)을 비롯해 <경주남산>(2017) <우공투양도>(2014)<금강산>(2004) 같은 대작 6점과 옛 막사발을 묘사한 정물화 <고미> 등 중간 크기의 작품 2점을 설치했다. 작품 수는 적지만 통념을 깨는 한반도 산하와 경주 남산, 금강산 같은 문화유산의 진경을 담은 대작들이 좌우로 도열하면서 330㎡(100평) 넘는 공간을 단번에 채울듯한 장대한 기운을 내뿜었다. 한국화 작가로는 최초이며 라크마가 다른 동양권 수묵회화 작가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비중 있는 초대전시를 연 적이 없었다는 점도 눈길을 모았다. 조선의 전통 진경산수와 17~18세기 중국 근세기 청나라 승려 화가 팔대산인 등의 개성적 필법을 두루 섭렵한 작가는 현장 사생과 표현적인 수묵의 붓질로 핍진한 질감이 느껴지고 산하와 사물의 떨리는 기운이 전달되는 대작 먹그림들로 현지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역시 버지니아 문이 기획한 이 초대전은 전시장 벽체를 짙은 검남색 계통의 어둡고 차분한 색조로 뒤덮은 것이 인상적이다. 흑백 화면 속에 기운 생동하는 출품작들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분위기를 빚어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로스앤젤레스/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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