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여행(女幸)화장실 앞 애도
아빠와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주변의 근황을 나누던 평범한 저녁이었다. 이웃집 어르신 건강은 어떤지, 최근 음식점을 개업했다던 지인분 가게는 괜찮은지 같은 소소한 얘기를 나누다 아빠는 요즘 통 뵙지 못하던 동네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새로 연애를 시작하신 분과 잘 만나는 듯했지만 돈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관계가 틀어졌다고 한다. 경제적 갈등의 당사자인 지인분의 의견이었는지, 이야기를 내게 전하는 과정에서 아빠가 덧붙인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의 마지막 결론은 ‘그러니까 요즘 여자들은 무섭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였다. 나는 아빠의 말을 들으며 아찔한 기분이었다.
안다. 성별도 세대도 다른 우리가 이야기 끝에 같은 결론을 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 순간은 시사토론의 자리도 아니었다. 그저 저녁식사에 곁들인 스몰톡이었을 뿐인데, 알면서도 좀처럼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뾰족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생각할 때 여자가 무서워? 잘못 엮여서 돈이라도 날릴까봐? 여자는 죽기도 해. 돈이 아니라 누구는 목숨을 잃는다고.” 즐겁고 재밌는 이야기만 주고받아야 화기애애한 저녁식사가 이어지는 줄 알고 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 수요일만 해도 한 여성이 자신의 근무지인 지하철역에서, 전 직장동료에게 살해를 당했다. 멀쩡히 출근해 일터에 있던 여성이 한순간에 살해당하는 이때에도 ‘여자가 참 무섭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남자 어른들의 무심함에 화가 났다. 돈을 잃은 이웃의 안타까움에 깊이 공감한 탓이라면, 대낮에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는 여성들의 사연에는 더 깊은 공감과 분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 강남역이 그러했듯 신당역에는 여성들의 분노를 담은 조화와 애도의 메모가 쌓여가고 있다. 공권력에 범죄를 신고했지만 피해자가 마주하는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피해자의 일상은 존중받지 못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재발방지를 위한 아이디어와 기대 효과를 적어내라는 공문을 각 사업소로 내려보냈다. ‘아이디어 동참’에 협력해서 하루 만에 작성하라는 급조된 공문의 그 빈칸은 그간 부실했던 대처에 대한 회사의 반성이나 동료를 잃은 슬픔 따위를 담을 마음이 없어보였다. 분실물 유실 방지를 위한 아이디어 수집도 이보다는 꼼꼼하고 체계적이지 싶다.
얼마나 더 많은 여성들이 일상을 위협받고 또 잃어버린 뒤에야 무탈한 하루를 당연하게 누릴 수 있을까. 한국여성의전화 조사(2019)에 따르면 미수를 포함해 10년간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 피해를 겪은 여성의 수가 무려 1600명에 이르렀다. 피해자가 자녀나 부모처럼 주변인인 경우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나고, 신당역 사건처럼 파트너라고 할 수도 없는, 아는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들까지 포함하면 피해자의 수는 몇 배수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 뻔하다. ‘무서운 요즘 여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실제로 얼마나 무서운지 숫자는 말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신당역 그 화장실에는 여성이 행복한 여행(女幸)화장실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무탈하고 안전한 하루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데, 변기 수가 넉넉하고 어린이용 시설과 손 건조기를 갖추었다고 그곳에서 과연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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