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몽마르트 언덕 동행자 : 수잔 발라동, 모리스 위트릴로〉
[헤럴드경제(파리)=이원율 기자]화가 위트릴로(1883~1955)가 자꾸 떠오른다. 고흐, 드가, 로트레크에 대한 가여움은 외려 밀려난다. 오후 7시. 프랑스 파리 18지구에 있는 몽마르트 언덕을 걸었다. 메트로 12호선 아베쎄(Abbesses)역에 내린 뒤 부지런히 올라 닿은 곳이었다. 19세기 파리를 문화 제국으로 만들어준 예술가들의 남루한 보금자리였다. 햇빛은 여전히 온화했다. 이날 트인 광장에서, 좁은 골목에서 술병을 든 위트릴로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식당에서,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주문도 못 한 채 그림엽서 따위를 베끼고 있는 위트릴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화가를 계속 곱씹자니 괜히 서러워졌다.
예술과 술, 그리고 밤은 서로에게 지독히도 기대려고 한다. 그래서일까. 몽마르트 언덕의 혈색은 이제서야 차츰 좋아진다. 화가들을 춤추게 한 술과 담배 냄새가 꿉꿉하게 피어난다. 대낮에는 어수선하던 이곳이 파리의 모든 기운을 힘껏 빨아들인다. 온갖 사람들이 몰려온다. 가슴이 푹 파인 헐렁 티에 무심하게 에코백을 든 파리지앵, 고래고래 웃고 소리치며 500㏄ 맥주잔을 거듭 부딪치는 관광객이 뒤엉킨다.
광장에서 붓을 든 여러 화가의 작품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거나하게 취한 예술 애호가들의 혀 꼬인 건배사도 들을 수 있다. 서로가 뿜어내는 권태와 일상, 설렘과 호기심이 뒤섞인 채 밀려온다.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좁은 골목, 더 너저분해지는 광장, 끈질기게 따라붙는 악사와 잡상인은 산만함을 안겨준다. 돌길은 울퉁불퉁하고, 담벼락 곳곳에는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있다. 몽마르트 언덕을 둘러본 뒤 P는 "어쩌면, 낭만과 불편함은 비례하는 듯해"라고 했다.
위트릴로는 18살에 그림을 배웠다. 평생 파리의 서민촌을 그렸다. 그는 이 중에서 몽마르트 언덕을 가장 사랑했다. 당시 몽마르트는 포도밭이 있는 도시 구석일 뿐, 파리 시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누추했다. 평지 중심의 파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였던 몽마르트는 접근성조차 별로였다. 방값은 시내와는 견주지도 못할 만큼 쌌다. 위트릴로는 삶에 서툰 자신과 서민, 가난한 예술가 말곤 굳이 발걸음이 닿지 않는 몽마르트 언덕이 서로 닮았다고 생각했다. 몽마르트를 지겹게 화폭에 담은 이유였다.
그런 위트릴로도 처음부터 화가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림은 알코올 중독을 잊기 위한 일종의 치료법이었다. 위트릴로는 원래 몽마르트의 부랑자에 불과했다. 그런 그에게 그림은 구명조끼가 되어줬다. 적어도, 불행의 바다에 숨 막혀 죽지 않을 만큼은 떠 있게 해줬다.
위트릴로가 몽마르트 언덕을 가장 아름답게 그린 시기는 '백색 시대(흰 시절·1908~1914)'였다. 당시 위트릴로는 몽마르트 언덕의 지저분한 집과 벽, 낡은 성당을 흰색으로 칠하는 데 집착했다. 그렇게 해 칠해진 그의 흰색은 세상에서 가장 절절한 색이었다.
사실 위트릴로의 그림에서 화려한 기교를 찾기는 쉽지 않다. 무르고 여리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죽죽 그은 듯한 붓질에서 느껴지는 투박함은 애틋함을 가득 풍긴다. 잘 만들어진 멜로 영화를 한 편 보는 느낌까지 든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의 모래와 돌가루 따위를 흰색 물감에 뿌리기도 했다. 달큰하게 취한 그가 비틀대며 걸어 다니다가 한 꼬집, 두 꼬집씩 주운 거였다. 위트릴로의 그림은 몽마르트의 숨결까지 품게 됐다. 이 때문일까. 누군가는 내게 위트릴로의 흰색에 대해 "애잔함을 넘어 코끝이 시릴 만큼 절절함을 느꼈다"고 한 적이 있다.
"상류의 주택가보다도 서민가 쪽으로…(중략) 나는 사인(死人·알코올 중독에 따른 별명)이 된 후 그림의 비결을 깨우쳤다. 백으로 칠해야 한다는 거다. 교회당에 있는 침묵의 색? 백으로 칠해야 한다. 병원과 형무소의 색? 백으로 칠해야 한다. 나의 일생은 이러한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집들에서 지냈다. 보잘것없는 백의 한 가운데, 바로 그곳에서…."
위트릴로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콤플렉스 범벅이던 그에게 흰색 물감을 드는 행위는 구원을 염원하는 기도기도 했다. 위트릴로는 순결한 흰색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루해 보이는 곳을 칠하는 행위가 자신을 감싸드는 불행을 씻어주길 바랐다. 누군가는 그가 그저 가장 싼 백색 물감밖에 살 돈이 없었기에 흰색을 택했다는 말도 한다. 그 말은 그 말대로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저녁 식사를 위해 르 콩슐라(Le consulat)를 찾았다. 몽마르트 언덕 내 비교적 중심가에 있는 이 식당은 19세기 당시 가난한 화가들의 아지트 중 하나였다. 사크레쾨르 대성당과 고작 몇 걸음 거리에 있다. 식당 안에서는 그 시절 파리 모습이 담긴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밖에서는 몽마르트 언덕 특유의 산만한 분위기에 잔뜩 스며들 수 있다. 식당은 빨간색과 초록색의 색 배합으로 앙증맞게 짜였다. 그래서인지 '파리에서 가장 귀여운 카페'로 통한다고 한다. 외벽에는 "피카소, 시슬레, 반 고흐 등이 다녀감"이라는 식의 자부심 가득한 안내문이 붙어있다. 이는 '파리에서 가장 인스타그램에 많이 오른 카페'라는 소문을 만드는데 톡톡히 역할을 했을 것이다.
테라스 위 놓인 자리에 앉아 덕 콩피(duck confit)를 주문했다. 프랑스 민간에서 만들어진 전통 요리인 덕 콩피는 기름에 3시간~3일 정도 담근 오리 고기를 꺼낸 후 바로 구워 먹는 음식이다. 이날 만난 파리와 8년째 연을 맺는 한 사진 작가가 "저도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몽마르트에선 르 콩슐라에요. 덕 콩피를 꼭 먹어야 한다네요?"라고 한 덕에 접한 요리였다. 김이 나는 오리 다리가 접시에 담겨왔다. 잘 익은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매끈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이 났다. 오리 다리는 벽에 붙은 포스트잇 떨어지듯 깔끔하게 떼어졌다.
위트릴로도 이곳에서 종종 밥을 해결했다. 밥보다도 술을 더 많이 들이켰다. 그림으로 술을 잊으려고 해봤지만 그러기엔 진중함도, 절제력도 부족했다. "위트릴로는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만날 수 있었다. 카운터 옆에 서 있거나, 벌써 고주망태가 돼 시궁창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위트릴로는 울고 소리를 지를 때가 많았다. 사람들은 매정하게 쫓아냈다. 그는 쓰러진 채 신음하며 또 울었다." 위트릴로 평전을 쓴 칼코의 문장이다.
그 시절 몽마르트의 단골 메뉴는 '빨리 빨리(술과 음식을 꺼내달라)'는 뜻의 브이스뜨라(Быстро)에서 유래한 비스트로, 적게 마시고도 맹탕 취할 수 있는 독주 압생트였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쓴 위트릴로는 특히 압생트를 즐겼다. 돈 없는 그에게 싼값에 진탕 취할 수 있는 압생트는 최고의 동반자였다. 누군가가 자기 그림을 비판하면 정말 돌아버려 종일 압생트를 입에 털어놨다. 위트릴로는 인사불성으로 포도밭에 배를 깔고 드러누울 정도가 돼야 압생트를 손에서 놓았다. 위트릴로의 대표적인 술친구가 그저 잘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몽마르트의 귀공자'란 별명을 얻은 모딜리아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쪽으로 올라가면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의 꼭대기에 닿을 수 있었다. 성냥갑 같은 파리의 건물들이 소금 가루처럼 반짝였다. 몽마르트는 파리의 가장 낮은 곳이면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거리의 악사들이 첼로와 색소폰을 연주했다. 젊은 여성 관광객 둘은 가로등을 부여잡고 깔깔 웃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술병을 든 위트릴로가 이곳에 멍하니 선 모습을 상상한다. 불행에 점철됐던 위트릴로도 저 불빛을 향해 팔을 뻗었을까. '위대한 개츠비'처럼.
몽마르트 언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단연 라 메종 로즈(La Maison Rose)다. 분홍색 벽과 올리브색 창문으로 꾸며진 이 건물은 "몽마르트의 주인공은 나야!"라고 말하는 양 통통 튀어 스쳐 지나갈 수 없다. 이곳은 샐러드와 스파게티, 디저트류를 파는 카페로 돌아가고 있다. 노상 테이블은 고작 5~6개뿐이었다.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고, 이들 중 단 한 팀도 이른 시간 내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딱 한 자리가 비어있었지만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찜'해둔 뒤였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벽을 쓰다듬는 일에 만족해야 했다.
위트릴로가 라 메종 로즈에서 살았다. 이 분홍색 건물이 유명해진 까닭이다. 사실 라 메종 로즈가 유명한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이곳은 몽마르트의 요정이자 르누아르와 로트레크, 드가 등 그 시절 거장들의 뮤즈였던 수잔 발라동이 살았던 공간이다. 무슨 관계길래 수잔 발라동과 위트릴로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살 수 있었을까. 발라동은 위트릴로의 엄마였다. 사실 발라동은 위트릴로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발라동은 1883년 몽마르트 언덕에서 위트릴로를 낳았다. 12월26일. 크리스마스가 딱 하루 지난 날이었다. 당시 18살이었던 발라동은 위트릴로에게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를 안겨줬다. 바로 '사생아'다. 샤반, 드가, 르누아르 등이 아버지로 입방아에 올랐으나 이들 모두 극구 부인했다. 발라동은 1891년이 돼서야 아들에게 위트릴로라는 성을 붙여줬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건축가인 미구엘 위트릴로가 발라동의 사연을 듣고, 손가락질받던 이 아이를 아들로 입적한 덕이었다.
예민함을 타고난 위트릴로의 삶에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었지만, 애석히도 가장 부족한 게 사랑이었다. 발라동은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고작 18살 나이였던 발라동은 위트릴로를 낳고도 여전히 몽마르트의 뮤즈였다. 우수에 찬 푸른 눈동자, 발그레한 볼과 붉은 입술, 윤기 나는 긴 갈색 머리카락은 변하지 않았다. 발라동은 위트릴로를 외할머니 집에 맡긴 채 밖을 나돌았다. 발라동은 그 무렵 그림 모델 일을 넘어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에도 푹 빠져있었다. 하녀에 서커스 곡예사, 댄서 일까지 했던 발라동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찾은 것이다. 까칠한 독설가인 드가에게 인정받은(드가는 발라동을 처음 본 자리에서 그녀의 드로잉을 사들였다!) 발라동의 삶은 봄바람을 맞은 유채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막 10대에 접어든 위트릴로는 더 이상 잡히지 않는 엄마 손 대신 차가운 술병을 쥐었다. 외할머니가 정신 불안 증세를 보인 위트릴로를 진정시키려고 술을 먹였는데, 그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이 되었다고 한다. 그쯤 학교 친구들이 술을 권했다는 말도 있다. 외로움에 굶주렸던 위트릴로는 술을 힘껏 빨아들였다. 은행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술 때문에 이어갈 수 없었다. 1900년, 위트릴로는 18살 때 병원에 입원했다. 알코올 중독이었다. 삶은 시궁창이었다. 끝없이 가라앉았다. 더는 발버둥 치며 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를 건져 올려준 게 발라동이었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 언덕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는 몽마르트의 제일 너절한 곳까지 그렸다. "뭘 저런 곳까지 그려?"라는 말이 들려와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의 수호자'로 불릴 만큼 주변을 배회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주변에는 여러 갈래로 길이 나뉘는데, 이 가운데 작은 길 하나에 '위트릴로 거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사실 위트릴로는 파리의 서민촌을 그릴 때 말고는 실력에서 기복이 심했다. 그림을 정식 교육기관에서 배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트릴로는 정식 교육기관이 아닌 엄마 발라동에게 그림을 배웠다. 18살, 병원에 입원했던 그때였다. 발라동은 위트릴로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술을 잊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둘은 처음으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어쩌면 위트릴로는 그림보다도 발라동과 함께 한 그 시간 자체를 소중히 여겼지 않았을까 한다. 위트릴로는 그림 덕인지, 엄마와의 시간 덕인지 알 수 없지만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20살쯤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에 천착했다. 하지만 샤반, 르누아르 등의 어깨 너머로 그림을 익힌 발라동은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할 역량이 없었다. 뭘 그려야 할 줄 몰랐던 위트릴로가 스스로 택한 게 자신과 똑 닮은 몽마르트였다.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추함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능력만큼은 탁월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위트릴로는 "내가 만약 파리를 떠난다면 몽마르트의 벽을 뜯어가겠다"라고도 했다.
발라동의 가르침은 그리 오래가지 않은 탓에, 위트릴로는 데생과 회화를 익히려고 거리를 나뒹구는 그림엽서들을 주워 거듭 베꼈다. 제멋대로 그린 위트릴로는 그 덕에 멋도, 기교도 없지만 저미고 담담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위트릴로는 그림을 배운 후부터는 울분이 치솟으면 술병만 들지는 않았다. 여전히 폭음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붓도 함께 들었다. 교도소도 들르고, 정신병원도 다녀온 위트릴로가 남긴 유화만 3000점 이상이다. 술에 취해 서명을 쓰지 않은 그림을 합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인물화도 그렸지만 5점 정도밖에 없다. 솔직히 풍경화와 비교하면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다.
몽마르트 언덕은 그리 편한 관광지는 아니었다. 경사는 생각보다 가팔랐다. 숨이 찰 정도였다. 너저분한 길목 곳곳은 쾨쾨했다. 남들에게 제멋대로 팔찌를 채운 뒤 돈을 요구하는 사기단(나를 노린 한 명은 내게 '너 어느 나라 출신이니?'라며 거듭 친숙하게 말을 걸어왔다), 식당과 카페를 비집고 들어와 악기를 괴발개발 연주하고 감상비를 걷으려는 사이비 음악가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소매치기도 많다. P는 과거에 몽마르트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려 펑펑 울던 한국 여자애를 본 적이 있다고도 했다. 가방끈을 더욱 부여잡게 하는 말이었다.
이런 신경질적인 면이 있지만, 이날 꼭대기에서 밀물처럼 서서히 와닿는 청색 공기를 보자니 마음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밤은 느긋히, 그러나 성실히 찾아오는 중이었다. 이 밤 기운을 크게 들이마시며 위트릴로는 오늘보다 덜 고통스러운 내일을 바랐을 것이다. 그뿐인가. 이 노을빛 안에서 마네와 모네는 예술을 논했을 테고, 이 노을빛 아래에서 드가와 고갱은 특유의 독설로 주변을 소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이 노을빛이 내리쬐는 골목에서 마티스와 피카소는 어슬렁거리며 서로를 염탐했을 것이다.
격정의 세월을 견딘 위트릴로의 말년은 잘 풀렸다. 정신 차려보니 파리의 구석구석을 가장 잘 그리는 화가가 돼 있었다. 위트릴로는 45살 때 발라동과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52살 때는 결혼도 했다. 하이라이트는 1950년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였다. 위트릴로는 마티스, 보나르 등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몽마르트에서 태어나고, 몽마르트에서 자란 위트릴로는 1955년 72살 나이로 몽마르트에 묻혔다. 사인은 폐충혈이었다.
위트릴로는 생 뱅센 묘지에 잠들었다. 위트릴로도 종종 찾은 몽마르트에서 가장 오래된 술집 라팽 아질(Lapin Agile) 앞에 있는 곳이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7)“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8)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9)“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0)‘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1)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2)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3)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빈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4)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5)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심화편 (2022. 9. 3)
16)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17)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야수주의·입체주의 심화 편 (2022. 9. 10)
18)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19)“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0)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행위예술 대모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출장 편〉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위트릴로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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