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관원·무관·상인·낭인들, 중국 곳곳 누비며 간첩 활동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3〉
1871년 9월, 메이지 유신 3년 8개월 후 텐진(天津)에서 청·일 양국이 머리를 맞댔다. 중일수호조규(中日修好條規)와 통상장정(通商章程)에 서명했다. 상호 영사관 설치를 약정하고 무역을 위한 상인과 민간인의 왕래도 허락했다. 일본인들이 중국 드나들며 정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894년 갑오년(甲午年), 우리의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1차 중·일(청·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20여 년간 중국 대도시의 일본 영사관 관원과 무관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단체와 민간조직, 상인, 종교인, 낭인들은 깡그리 중국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
주중 무관, 2년 새 청국북경전도 등 완성
1872년 봄, 전도유망한 육군 장교 한 명이 약혼녀에게 파혼을 통보했다. 그림 잘 그리는 부하 2명과 함께 상인과 여행객으로 위장해 중국을 누볐다. 상하이(上海)와 산둥(山東), 특히 동북(東北) 지역을 비밀리에 정찰했다. 귀찮게 구는 촌구석 말단 관리들은 구워삶기 쉬웠다. 아편이나 부인들 주라며 은반지 몇 개 주면 나가떨어졌다. 길 안내를 자청하며 묻지 않는 것까지 친절히 알려줬다. 군부대 위치와 기후, 지형, 교통, 하류의 결빙(結氷)과 해동(解凍)시기 등 각종 정보가 담긴 지도를 완성했다. 해양훈련 교관 출신은 중국 해안지역과 대만을 정찰하며 예술작품 같은 지도를 만들었다. 일본군은 훗날 이 지도에 담긴 정보를 토대로 대만 침략 계획을 세웠다. 주중 무관은 역사적 명승지 유람을 이유로 베이징과 후난성(湖南)성을 샅샅이 훑었다. 2년 만에 청국북경전도(淸國北京全圖)와 청국호남성도(淸國湖南省圖)를 완성했다.
1880년부터 7년간 중국을 정탐한 일본군 소좌는 본국에 청나라정벌방안(征討淸國策)을 보냈다. 내용이 가관이었다. 1886년 청나라의 국고 수입과 국방예산, 100여 개 항구의 포대와 지형, 우물의 위치와 수심에 관한 정보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고토 “만철, 동인도회사처럼 능력 충분”
전쟁 승리 후 일본 상층부에 ‘대륙 이민’을 조심스럽게 거론하는 사람이 한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승세를 몰아 러·일 전쟁 마저 승리하자 일본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러시아가 관장하던 관동지역에 관동도독부를 신설하고 식민통치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만철 초대 총재로 부임한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는 식민지 착취에 관심이 많았다. 대만총독부 민정장관 시절 총독에게 묘한 의견을 낸 적이 있었다.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합법적인 무역과 상업을 명분으로 인도의 무궁무진한 보물을 약탈해 본국으로 보냈다. 만철은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했던 역할을 중국에서 감당할 능력이 충분하다.”
고토는 취임식에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만철의 임무는 철마(鐵馬) 경영과 광산개발, 이민, 목축업 발전 4가지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민이다.” 당시 관동 도독이 후쿠시마 야스마사였다. 후쿠시마도 고토의 구상에 공감했다. 뤼순(旅順)과 다롄(大連) 주변에서 벼농사에 적합한 곳을 물색했다. 다롄 교외 진저우(金州)의 다웨이자툰(大魏家屯)지구가 토질이 비옥하고 벼농사에 적합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현지 파출소 순사(경찰)가 벼농사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주저하지 않았다. 즉석에서 결정했다. “만주에 오는 일본이민의 거점이 필요하다. 다웨이자툰에 일본이민 모범촌을 건설해라.” 일본 농상무성(農商務省)의 세밀한 조사 결과도 후쿠시마를 만족시켰다.
첫 번째 만주이민은 빈농지역 주민으로 국한했다. 야마구치(山口)현이 후보로 떠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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