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인문정원] 가을로 오라

2022. 9. 1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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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하는 자는 근심으로 삶 영위
인내와 기다림은 존재의 숭고함

진로를 예측하기 어려운 태풍이 지나갔다. 다시 하늘은 쾌청하다. 빨래를 널면 잘 마를 날씨다. 빨래가 잘 마르는 날씨는 기분을 좋게 한다. 우주에 새로운 별들이 나타나 붕붕거린다. 미국 나사(NASA·항공우주국)는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으로 ‘타란툴라 성운’의 우주 먼지와 가스 속에 숨은 젊은 별 수만개를 찾아냈다고 발표했는데, 이 성운은 지구에서 약 16만1000광년 떨어진 대마젤란 은하 내에 약 340광년에 걸쳐 펼쳐져 있다. 본디 이름은 ‘황새치자리 30’(30 Doradus)이다. 거미를 닮아 ‘타란툴라’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나는 미지의 우주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 때마다 흥분된다.

우리는 고양이를 집 안에 남겨두고 동네 빵집에 들러 파리 바게트와 파리 크루아상을 사고, 세탁소에 들러 지난 계절의 옷들을 찾고, 오후 느지막이 산책에 나선다. 가을의 초입이다. 불꽃 여름은 끝났다. 왔던 것들은 덧없이 사라진다. 물은 맑아지고 하늘은 깊은 푸름을 갖게 된다. 셔츠의 소매 단을 접어 올리며 우리는 관습적 죽음에 저항한다. 태양을 보라. 벌써 저 너머로 지려고 한다. 뉘엿뉘엿 태양이 지고 나면 쇠잔해지는 저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어라. 저건 생명의 신호이자 곧 도래할 죽음의 신호다. 베개를 안고 근심하는 자에게 근심은 불멸에 따르는 품삯이니, 근심하는 자는 그 근심함으로 제 삶을 살아낸다.
장석주 시인
근심이 불멸의 심지를 태워 저를 빛나게 한다면 고독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는 제가 올 때를 알리지 않고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를테면 석탄은 먼 과거에서 온 열의 힘줄이자 가능성이다. 석탄의 힘은 저 맹목의 쌓여 있음에서 나온다. 쌓여 있음이 석탄의 부(富)다. 저탄장에 쌓인 저 검은 것은 불이라는 제 본질을 감춘다. 눈보라가 하얗게 표면을 덮고 있으니 저 석탄의 내면 형질이 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그사이 불은 석탄을 집어삼키고 천천히 소멸시킨다.

타오름을 부추기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불의 에너지다. 하지만 불의 종말은 재다. 타오르고 남은 에너지가 재다. 재는 무(無)다. 재에서 날아오르는 새여, 불사조여. 밤의 근간에서 이마를 수그리고 있는 처녀들, 문득 어둠이 달을 희생 제물로 데려온다. 너는 세상 모든 고양이들의 어머니인 달을 처형한다. 세상의 아궁이는 제 슬픔으로 불을 꺼트리고 침묵한다. 너는 밤의 책을 펼쳐라. 너는 지상에서 수직 낙하하는 별을 보고 죽은 별들의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가을을 갈망하던 자들과 우리는 새로 무엇인가를 도모할 때, 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의 부스러기가 있는가? 고통에서 새로운 생각을 출산하고, 고통만이 우리에게 치유력을 줄 것이다. 고통은 생각을 찢고 나온다. 아직 길고 느린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 고통을 잘 견딘다는 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성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쓴 시와 우리가 그린 그림은 스스로 아름다워지리라.

잘 익은 포도는 따 내려라. 부지런한 아버지와 아들이 힘을 합쳐 포도원의 수확을 끝내고 나면, 이제 포도원은 차갑게 부는 바람의 차지다. 그 아버지와 아들은 봄이 올 때까지 포도원을 찾지 않을 것이다. 지금 침상에 누운 자들은 다시 일어날 때다. 은신과 변신의 계절이 오면 너는 어디로 갈 것인가?

존재는 주어지는 것. 존재는 우연의 누적 속에서 제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존재는 지상을 움켜쥐고 제 삶을 도모한다. 인내와 기다림은 존재의 미덕이고 숭고함이다. 인내와 기다림이 없다면 이 세상의 무구하고 아름다운 것들 중 절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순응하는 태도다.”(한병철) 그러니 살아남은 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나는 당신을 가을로 초대한다. 내가 당신을 초대하는 시간은 한 시인에 따르면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나의 얼굴은 저녁이고, 그대의 속눈썹은 아침,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은 피와 그리움”(아도니스)이다. 오라, 당신, 우리의 가을로! 와서 잘 익은 열매들을 따 내리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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