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아름다운 조연, 그대가 진정한 위너입니다

2022. 9. 1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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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배경인 풀잎 역할이어도
햄릿의 무덤파기 역할이어도
오케스트라서 작은북 맡아도
최선을 다하는 삶은 아름다워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이경희 작가의 ‘현이의 연극’이라는 수필을 오래 기억한다. 아이의 연극 공연을 보려고 공연장을 찾은 엄마의 시선으로 쓴 글이다. 엄마는 설렌 마음으로 공연을 보게 되는데 아이의 역할은 공연 내내 무대 뒤에서 풀잎 모형을 흔들고 있는 ‘풀잎’ 역이었다. 근사한 주인공 역할을 기대했던 엄마는 실망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가 자신이 연극에서 실수한 것을 알게 될까 봐 마음을 졸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짠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격려하게 된다. 이렇듯 부모는 늘 자신의 아이가 주연이기를 바란다. 어떤 장소에서든 주목받는 아이이고 인생 전부를 그렇게 살 수 있게 기도한다.

이렇듯 연극 무대에서 주목받는 역할은 역시 주인공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원로 배우들이 최근의 공연에서 보여주었다. 2016년 한국 연극계 거장들이 출연했던 연극 햄릿을 최근에 다시 국립극장에서 공연하였다. 햄릿은 400년 동안 재해석되어 무대에 올려졌고 아직도 활발히 공연되는 고전인 만큼 배우들에게도 각별한 애정과 깊이가 느껴질 것이다. 권성덕,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유인촌, 윤석화, 손봉숙, 길해연 등 평균 연령이 73세인 원로 배우들이 출연해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천수호 시인
올해 82세인 권성덕 배우는 작년 여름 문화비축기지 야외공연장에서도 감동을 주었다. 소외와 고독을 침묵으로 그린 페터 한트케의 ‘우리가 서로 알지 못했던 시간’이라는 작품에서 쏟아지는 빗속에서 야간 공연하는 모습은 그의 열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햄릿 공연에서도 ‘무덤파기’ 역할에서 그 존재감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주연급 대배우들이 이렇게 후배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조연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함으로써 연극에서 역할이라는 것의 경중이 결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배우 1, 2, 3, 4의 역할을 박정자, 손숙, 윤석화, 손봉숙 배우들이 각각 맡았는데, ‘배우 1’ 역의 박정자(80) 배우는 “배우에게 배역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대 한구석이나 조명 밖에 비켜 있더라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배우들의 숙명”이라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7000만부 이상 팔린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소설인 ‘호밀밭의 파수꾼’에도 아름다운 조연이 등장한다. 오케스트라에서 작은북을 치는 단원인데 한 곡에서 단 두 번밖에 없는 북 치는 기회를 전혀 지루한 기색 없이 기다리는 사람이다. 주인공 콜필드는 그를 예수께서 진정으로 좋아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손이 쉬고 있을 때도 긴장을 놓지 않으며 그러다가 북 치는 차례가 되면 심각한 표정을 하고 매우 멋지고 아름답게 북을 울려댔다. 소설 속 16세 소년인 콜필드의 눈에 비친 이 멋진 조연을 우리는 오래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인 문화심리학자 이누미야 요시유키는 ‘주연들의 나라 한국 조연들의 나라 일본’이라는 책에서 한국인에게는 자신이 주연이 되어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체성 문화의 특성이 있다고 했다. 이런 지적은 우리를 좀 더 유연한 사고로 이끌게 하여 조연이지만 주역으로 사는 지혜를 생각하게 한다. 무대 배경 중 일부인 풀잎 역할이어도, 연극 햄릿의 무덤파기 역할이어도, 오케스트라의 작은북 연주자여도 각자의 인생에선 모두가 주역이다.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을 맡아도 최선을 다하는 삶은 아름답다.

건강을 챙기는 것 또한 주역의 삶을 사는 최선의 노력이라는 의미에서 최근에 나는 탁구를 시작했다. 예전에 단순히 승부에만 집착했던 자신을 바로잡아야 하니 기본자세부터 다시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경기할 때면 처음부터 다시 배우겠다던 자세는 흐트러지고 경기의 승리에만 혈안이 된다. 승자만이 주역이 될 수 있다는 무의식 속의 이런 비장함이 탁구를 더욱 망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탁구장 벽면에 걸린 푸른 플래카드는 잠깐의 욕망에서 깨게 한다. “과욕으로 얻은 승리보다 웃음으로 패배를 인정하는 그대가 진정한 위너입니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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